<우수상> 좋은 의사란

<좋은 의사란>
박시원 인하대학교 본과2학년

‘17번?, 인품이 훌륭한 의사와 의술이 훌륭한 의사 중 어떤 의사를 사람들이 선호할 것 같아요?’ 내 번호와 날짜가 겹쳐 불길했던 날에 교수님께 받았던 질문이다. 물론 의술이 훌륭한 의사를 선호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전자일 것이라고 문득 떠올린 나는 대답한다. ‘인품이 훌륭한 의사를 더 선호하지 않을까요?’, ‘하하, 아니에요, 의술이 훌륭한 의사에요.’, ‘아무리 친절해도 잘못 진료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선호하지는 않습니다.’친구들의 웃음과 이어지는 교수님의 강의의 화음 속에 나는‘오답’을 조용히 희석해 나간다.
저녁을 먹고 다시 앉아 오늘 수업한 내용을 꺼내보는 쳇바퀴 속에서, 의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한명의 학생으로서 하루의 수모를 곱씹어보았다. ‘좋은 의사란?’나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좋다’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는 건 인터넷에 검색해 보는 것이 손버릇이 되었다. ‘대상의 성질이나 내용 따위가 보통 이상의 수준이어서 만족할 만 하다.’사전에서의 서술은 내 궁금증을 전혀 해결해 주지 못했다. 그놈의 ‘성질이나 내용 따위’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이 따위로 써 놓을게 뭐람? 모르는 것을 찾아보았을 때 서술이 복잡하거나 애매할 경우 여느 때나 나오는 의학과 학생의 반응이다. 백과사전은 나에게 도대체 ‘무엇이 보통 이상의 수준이어서 만족할 만 한가?’에 대해서 되묻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해야할 소중한 학생의 시간들은 야속하게도 공부를 하지 않을 때에 더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같은 문장을 여러 번 읽어보는 습관이 있다.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조금씩 꺼져가는 화면 앞에서 나는 문장의 끄트머리를 재독한다. 만족할 만 하다라, 도대체 누가 만족할 만 하단 말인가? 내 생각의 이정표가 다른 곳을 향하기 시작한다. 교수님의 질문은 이미 ‘사람들’에게 좋은 의사가 누구인가를 묻고 있었다. 그렇다면 의사는 진료를 받는 사람들이 만족하면 좋은 의사로 정의되는 것인가? 그가 포함된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의, 그가 포함된 직장의 동료들의, 그가 책임지고 있는 가족의, 아니 그 무엇보다 본인의 만족은 ‘좋은 의사의 정의’라는 훈장에 일부분도 기여할 수 없는 것인가? 난해한 것에 대한 생각을 할 때면 늘 머리 뒤쪽이 뻣뻣해지고 지끈거린다.
커피, 이럴 때면 늘 찾게 되는 커피. 하루 한잔 먹던 것이 학기를 지나면서 두잔, 세잔 조금 씩 버릇처럼 늘어왔다. 그래도 담배를 하지 않으니까 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자주 가는 카페에 발을 들인다. ‘어서 오세요, 스타벅스입니다!’하며 카페의 상호를 기운차게 외치는 바리스타에게 커피를 주문한다. 가장 큰 사이즈에 샷을 하나 추가. 항상 같은 주문내용이 익숙한 듯, 몇 분되지 않아 주문한 커피가 나온다. ‘주문하신 시원 고객님, 긴 빨대 챙겨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문에 달아둔 종이 딸랑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안녕히 가세요!’를 연발하는 매장을 뒤로하고 마시는 한 모금은 언제나 기분 좋다. 돌아오는 횡단보도 위에서 ‘참 좋은 카페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득 드는 생각, ‘내가 커피를 마시고 만족하면 저 바리스타는 ’좋은 바리스타’로 정의되는 것인가?’내가 마신 커피의 맛이, 카페의 분위기가, 내가 바리스타로부터 받은 친절함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보통 이상의 수준이어서 만족할 만 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바리스타가 생각하기를 평소에 만들던 실력만큼의 커피가 나오지 않아서, 생각했던 것 보다 카페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복잡한 집안사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을 다하지 못해서 본인의 하루 업무가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그 바리스타는 스스로를 ‘좋은 바리스타’로 정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만족한 손님이 바리스타에게 그 어떠한 극찬을 해도 본인은 본인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반대로, 최고급의 커피만을 상정했던 전문가에게 상기 바리스타가 본인이 최고로 만족할 수준의 커피를 대접한다고 해도 전문가는 만족하지 못 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전문가는 ‘좋은 바리스타’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것이다. 비록 바리스타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커피를 내 놓고 ‘나는 참 좋은 바리스타야.’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라도.
공상을 하다 보니 어느 새 밤이 깊었다. 해는 지고, 가로등이 켜진다. 하루의 모든 시간을 공을 들인 생각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 도대체 ‘좋은 의사’라는 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사전적인 정의는 내가 생각하는 기나긴 여정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인품과 의술이 모두 보통 이상이고 사람들과 본인을 모두 만족시킬만한 수준에 다다른 의사’가 바로 ‘좋은 의사’이다. 좋은 의사의 정의에 대한 생각은 이미 커피를 사고 나오는 동안에 마무리를 지었음에도 내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의문점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인품과 의술’사이의 경중을 따지는 것에서 교수님은 의술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맞는 말이다. 인품이 보통 이상의 수준을 가진다고 해도 의술이 보통 수준이상에 다다르지 못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인 것이지, ‘좋은 의사’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럼 정말 마지막 질문, 그럼 ‘사람들과 본인’사이의 경중은 어떠한가? 사온 커피를 거의 다 마셔간다. 교수님이 질문에서 이미 ‘어떤 의사를 사람들이 선호할 것 같아요?’라고 한 것에서 은연중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족도가 더 중요하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의사’라는 것은 내가 바리스타의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바리스타를 평가한 것처럼, 의사의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의사를 평가한 결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를 ‘좋은 의사’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의 평가를 완전히 차단하려는 행위는 지양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본인이 스스로 ‘좋은 의사’라고 평가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온 뒤부터 이 논쟁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스스로 ‘좋은 의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좋은 또는 나쁜 의사’라고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스스로를 ‘나쁜 의사’라고 평가하고 있다면 빨리 본인의 나쁜 점을 고쳐 ‘좋은 의사’로 자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스스로를 ‘좋은 의사’라고 평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좋은 의사’로 평가하는 사항보다 중요하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가방을 메고 집으로 향한다. 젠장, 오늘 하루 공부는 망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좋은 학생’이 되기는 그른 것 같다. 집에 와서 내일 수업의 강의록을 확인한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 까지 수업이라니 내일도 힘든 하루가 될 것이 분명하다. 내일을 위해 빨리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눕는 데 문득 떠오른다.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더 생각을 했다간 내일 수업에 늦고 말 것이다. 갑자기 공기 청정기가 위잉 소리를 내면서 돌아간다. 마치 내 머리 속의 생각들을 빨아들이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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