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를 진단한다

혐오사회를 진단한다

사회는 다양한 사회구성원들로 이루어지고, 그 다양성은 서로 간의 차이로 인해 생긴다. 정치적 성향, 성별, 인종, 종교, 사랑의 방식 등도 그 중의 일부이다. 그러나 근래의 인터넷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람 간의 차이를 소재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상황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그 공격이 현실 세계까지 확장되어 신체적 상해를 입히고, 심하게는 살인하는 사례들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혐오’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얼핏 느끼기에는 이러한 광범위한 사회의 혐오 현상이 우리나라만의 일에 국한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 이는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는 난민 혐오, IS의 테러리즘, 혐오에 의한 총기 난사 사건 등 몇 가지 키워드만으로도 뒷받침할 수 있다. 또한 이는 현재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일도 아니다. 나치, KKK단, 마녀사냥 등 과거에도 이러한 일들은 늘 존재해왔으며 현재는 다른 양상으로 변주된 혐오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치즘과 KKK단이 현 사회의 대중들에게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각인된 반면에, 현 사회에서의 일들이 결국에는 선례와 동일하게 혐오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인식은 보편적이지 않은 편이다.
질병을 진단받는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의사가 환자의 병을 진단하듯, 예전부터 글로써 시대의 병폐를 진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현재는 ‘시대 진단’이라는 장르로도 대표되기도 한다. 1995년에는 로버트 H. 프랭크와 필립 J. 쿡의 <승자독식사회>(The Winner-Take-All Society)가 소수가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회를 말했고, 2012년에는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긍정과 자유 속에서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의 실태를 풀어내었다. 올해 출판된 카롤린 엠케의 <혐오사회>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혐오가 만연한 현 시대를 진단한다. 본 기사에서는 이를 참고로 혐오 현상의 전반과 대안에 대해 알아보고, 이 책이 주로 독일 내에서의 갈등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사례를 통해 문제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왜 혐오하는가

<혐오사회>에 따르면 혐오하는 이들은 아무 이유 없이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근거가 있다. 다만 이 근거들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틀 안에서 답습되어 온 결과물이며, 이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인터넷 포럼, 토론 포럼과 출판물 등 대중 문화와 언론이 큰 역할을 해 왔다. 혐오의 패턴 중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대상을 개개인이 아닌 집단으로만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대상의 개개인으로서의 면모를 상상하는 것을 차단하며 개인과 집단을 동일시하는 협소한 시각을 안겨준다. 여기서 더 큰 문제점은 일부 언론이 이러한 시각에 편승하고, 심지어는 부추긴다는 것이다. 언론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예컨대 흑인이 일으킨 범죄에 대해서 언론은 범행과 ‘흑인’이라는 이미지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다룬다. 이와 동시에 다른 이미지, 이를테면 백인의 범행은 다루지 않음으로써 이에 노출된 사람들은 흑인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나라의 사례로 이를 이해해보자. 2016년 5월, 강남역의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은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조현병 환자인 피의자를 담당한 권일용 경찰청 범죄행동분석팀장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피의자의 질환에 대해 “반드시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제외한 타인들의 행동들에 전체적으로 적대감을 갖고 있는 형태”라며, “자신의 공격행위가 실패했을 경우 다시 공격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대상을 상대로 자기의 분노감을 표현하는 형태가 가장 많다”고 말한 바 있다. 앞의 논리를 도입해보자면 초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범행의 요인이자 본질, 즉 피의자의 개인적 이력이다. 그러나 일부 언론과 포럼들이 여성혐오라는 프레임을 씌우면서, 묻지마 범죄에 대해 약자를 보호할 건설적인 대안 대신에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사회분열적인 담론이 떠올랐다. 후자는 사회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려는 단합이 아니라, 이분법적으로 갈라져서 오히려 서로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분위기를 형성하여 적절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을 방해했다. 이는 달을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바라보는 격이었다. 피의자를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받아들이고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한 개인인 피의자와 동일시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혐오가 날이 갈수록 확장하는 데에는 혐오를 방조하는 사람들의 책임 또한 있다. 개입하지 않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무관심으로 일관함으로써 혐오가 증식하는 것을 묵인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증오에의 공모’라고 표현한다. 혐오에 대해 아무런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더라도 결국에는 혐오를 받는 사람들이 버려지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혐오하는 이들이 ‘너’와 ‘나’로 이분화하는 기준, 즉 ‘내’가 ‘너’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책에서는 그것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동질성, 본연성, 그리고 순수성이다. 그러나 동질성에서 그들이 말하는 민족, 국가라는 공동체는 결국에는 상상된 공동체이며, 이것이 여러 민족이 합쳐진 공동체보다 낫다는 증거도 없다. 두 번째로 본연성을 근거로 혐오하는 이들은 트랜스인들의 ‘불명확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트랜스인들은 타인에게 성 정체성을 바꿀 것을 강요하지 않으며 기본법에 따라 자신의 인격을 발현할 권리를 바라는 것뿐이다. 마지막으로 순수성은 IS와 같이 본인들을 절대적인 선으로 보고 나머지 의견은 악으로 보아 ‘불순한’ 타자를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이다.

우리나라의 혐오 현상

특히 인터넷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는 특정 성향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의 형성이 두드러진다. 그러한 커뮤니티의 대표격으로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가 있다. 김학준의 논문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에서는 일베를 꿰뚫는 감정은 되려 혐오보다는 냉소임을 말한다. 또한 이를 야기한 원인을 살펴보면 특히 요즘 청년세대에게 고달픈 취업경쟁이 낳은 불안과 공포가 두드러지며, 인간관계에서 느낀 좌절과 배신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들은 열심히 살고 있음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수치심이 있으며, 그들이 생각하기에 소위 ‘평범한 삶’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냉소가 표출된다. 예컨대, 그들은 본인들과는 다르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데모나 하는’ 이들이 사회적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혐오로 맞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야기한 우리나라의 사회구조에 대한 성찰이 필요함을 느끼게 한다.

어떻게 바꿔야 할까

1. 자신에게 해당하지 않는 일이더라도 부당한 일이라면 그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 즉 모욕이 상처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차별을 받는 사람들만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8년 방송된 EBS 다큐프라임 ‘초등생활 보고서’ 1부의 차별 편에서는 한 가지 흥미로운 실험이 등장한다.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가 하나 있는 한 초등학교 학급에서 진행된 이 실험은 선생님이 키를 기준으로 열등생과 우등생을 구분하겠다고 말하며 시작된다. 열등생들과 우등생들을 구분해놓고 열등생들에게는 무조건 꾸중을, 우등생들에게는 무조건 칭찬을 하여 대놓고 차별을 하는 것이다. 차별을 당한 적이 없던 열등생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는 등 불만을 표출한다. 다음 날은 열등반과 우등반을 바꾸어 실험을 진행한다. 좀 더 많은 수의 인원이 차별을 겪게 되자, 이번에는 아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차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보인다. 초등학교의 한 학급이 이 사회 전체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방관자들이 차별이 남의 일이 아닌 본인의 일이 되었을 때 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사회에서 처음 보여지는 현상은 아니며, 현 사회의 공감능력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 사회의 습관과 신념을 형성해 나가는 데에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 있다.
2. 혐오에 대한 비판은 그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혐오가 자라나는 구조와 작동하는 조건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즉, 혐오를 혐오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이로써 인식의 틀을 개인을 집단으로 보는 혐오의 틀이 아닌, 개개인의 개성과 서로간의 유사점도 볼 수 있는 건전한 인식의 틀로 전환해야 한다.
3. 순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찬미가 필요하다. 사회 내에서의 다원성은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해주며 서로의 개성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현재 우리는 민주주의 하에서 어느 때보다도 자유를 누리는 시기에 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서로 간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혐오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공격이 아닌 공감, 배제가 아닌 포용이다.

남현서 기자/연세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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