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라면, 히포크라테스 라는 이름은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그의 이름보다는 사실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우리에게는 더 친숙하긴 한데, 본과 4학년 과정을 모두 마치고 의사 국가고시를 통과하신 선배님들께서 졸업식 날 읊으셨던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필자에게 아직도 감동의 순간으로 남아 있다. 의대생들 대부분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떠한 족적을 남겼는지 등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생애와 업적, 사고방식 등등에 대하여 글을 써 보았다.
‘의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BC 460년에 그리스의 코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대대로 의술에 종사한 집안이었는데, 어떤 소문에 따르면 그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있다는 말도 있다. 그 당시의 의사는 지금처럼 엄격한 자격요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히포크라테스의 집안처럼 대대로 의술에 종사했던 집안의 사람이 가문의 일을 이어 나가는 식으로 의사가 되었었기 때문에, 그가 의사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의학에 대한 지식들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당시의 의사는 물론 뛰어난 실력도 중요했지만, 지금처럼 의술이 발전되지 않은 사회 였어서 사람들은 의사의 평판 또한 중요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펼치는 논쟁이나 언변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히포크라테스는 그러한 면에 있어서도 뛰어나 사람들에게 평판도 좋았다고 한다.
그는 체액론에 근거한 생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체는 물, 불, 흙, 공기라는 4원소로 되어 있고, 인간의 생활은 이에 상응하는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4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이 4가지 액이 조화를 이룰 때를 에우크라지에 라고 불렀고, 균형이 맞지 않을 때를 디스크라지에 라고 불렀는데, 조화롭지 않을 때 병이 생긴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또한 환자의 여러 가지 증상 중에서 발열을 아주 중요한 병이 나아 가는 신호로 생각하였고, 병을 치유하는 것은 환자 자신의 자연 치유력 뿐 이라는 설을 세워 발열과 같은 증상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치료의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의 고향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주변의 국가들(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를 여행하며 의술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사망 전까지 테살리아 라는 곳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큰 명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는 일생 중 자신의 고향에서 의술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곳에서 그의 학설을 모은 히포크라테스 전집이 그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사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럼에도 그가 후대에 명성을 떨치고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이 히포크라테스 전집 때문이다, 이 전집 안에는 의사의 윤리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도 이 저술서 안에 들어 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바로 우리가 쓰는 선서는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 원본이 아닌, 그것의 수정판 이라는 것이다. 지금 사용되는 선서는 1948년에 세계 의사협회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나치의 학살에 동조했던 일부 의사들의 과오를 반성하기 위해 수정한 ‘제네바 선언’이다.
히포크라테스라는 사람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의술로 환자들을 치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의사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위대한 의학자로 추앙받는 것은, 그의 의학에 대한 열정과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현대 사회에까지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 모두 실력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하여 항상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김동규 기자 / 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