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학의 선구자, 앨리스 해밀턴 들어 보셨나요?

학교에서 직업환경의학을 배우다 보면, ‘앨리스 해밀턴’이라는 이름을 듣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다. 앨리스 해밀턴이야말로 직업환경의학의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산업 보건계 종사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상의 이름이 ‘앨리스 해밀턴상’일 정도이며, 국내에도 이미 앨리스 해밀턴의 자서전이 출간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앨리스 해밀턴의 삶에 대해 자세히 조명해보고자 한다.

앨리스 해밀턴은 1869년 2월 27일생으로, 뉴욕에서 자라 1893-94년 미시간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노스웨스턴대 병원과 뉴 잉글랜드 병원에서 인턴을 마친 후, 의학 실습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미시간 대학교로 돌아와 세균학을 공부하였다. 해밀턴은 그때 처음으로 공중 보건(public health)에 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세균과 병리학에 관한 연구를 하다가 1897년,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교 의과대학에 병리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대학이나 종교단체들이 이민자들에게 기본적인 교육과 보건의료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정착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해밀턴은 정착 운동 단체 중 세 번째로 큰 ‘Hull house’에 들어갔고, 여기에서의 활동은 그의 생각과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곳에서 활동하면서 머릿속에 막연히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던 이웃에 대한 봉사 정신을 본격적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었다. 또한, 그곳 주변에 거주하는 이민자들은 때때로 산업 재해를 당했기 때문에, 그가 이를 도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밀턴이 산업의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까지, 그는 삶의 목표 부재와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꼈다. 해밀턴은 자신의 의학 지식 및 연구 활동의 결과물을 이용하여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였으나, 이는 쉽지 않았다. 1899년 그가 쓴 한 편지에서 “저는 전혀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병리학회에 발표하기 위해 논문을 쓰느라 애를 썼는데 그 논문은 너무 형편없어서,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당신은 제가 동시에 세 가지를 잘하려고 노력했다가 그 세 가지에 모두 실패한 것, 그것이 어떠한 느낌을 주는지 모르시겠지요. 당신이 도대체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세 가지인 교육자로서, 빈민활동가로서, 그리고 과학자로서 실패했다는 느낌이 떠나지 않아 해밀턴을 낙담하게 했다.

또한 해밀턴의 연구가 처음부터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1902년, 시카고에 장티푸스가 만연하였을 때, 해밀턴은 자신이 연구 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지역사회 환자들에 대한 현장 조사와 세균학 검사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장티푸스 유행의 원인은 불완전한 쓰레기 처리”라는 연구 결과를 도출하여, 이를 시카고 의학회와 미국 의사협회지에 실었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실제로 장티푸스가 유행한 원인은 중앙상수도관이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오물이 상수도로 새어 들어간 것이었다.

1907년, 해밀턴은 기존 문헌을 탐색하던 중, 미국에서는 유럽과 달리 산업의학이 많이 연구되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산업의학에 관해 연구를 시작한다. 해밀턴은 정착 운동 단체에서 일하는 동안 이민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산업장에서 얻은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많이 보았고, 이를 떠올리며 산업에 의해 발생한 질환에 관한 광범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1910년 일리노이 주에서 미국 최초로 직업병위원회를 설립하여 직업병에 관한 현장조사를 시작할 때, 해밀턴은 미국 내에 몇 없는 직업병 전문가로서 의료 수사관에 임명되게 된다. 해밀턴은 산업 공정 과정이 근로자들에게 납 중독과 같은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Illinois Survey’라는 보고서에서 이를 알렸다. 위원회의 노력으로 1911년 일리노이 주, 1915년 인디애나 주, 기타 주에서 직업병 관련 법률이 통과되었다. 새로운 법은 고용주가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안전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하도록 한다.

1916년까지 해밀턴은 납 중독에 대한 미국의 선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녀는 다양한 주 및 연방 보건 위원회의 다양한 이슈를 조사했다. 해밀턴은 에닐린 염료, 일산화탄소, 수은, 테트라에틸 납, 라듐, 벤젠, 이황화탄소, 황화수소와 같은 물질의 영향을 조사하면서 직업적 독성 장애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1925년, 그녀는 휘발유 납 사용에 관한 공중 보건 서비스 회의에서 납 사용에 반대하는 증언을 했고 그것이 사람들과 환경에 끼치는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 휘발유의 사용은 계속해서 허용되었다. 그 결과 1988년 EPA는 이전 60년 동안 6800만 명의 어린이가 납 연료로 인한 높은 독성 노출로 고생했다고 추정했다.

1919년 하버드 의과대학은 해밀턴을 산업독성학(industrial toxicology) 강좌의 초대교수로 초빙하였다. 당시 하버드 의과대학은 여성 교수의 채용은 물론이고 여학생들의 입학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산업독성학 분야에서는 감히 해밀턴을 뛰어넘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해밀턴은 학교에서 강의와 연구 활동에 매진하였다. 또한 연방정부의 특별연구원으로 현장조사를 하기도 하였으며 그 밖에도 여러가지 사회 운동에 참여하였다.

직업의학 수업시간에 우리는 앨리스 해밀턴의 업적에 관해 짧게 한두 줄 정도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앨리스 해밀턴이 나타나기 전까지, 미국은 작업장에서의 중금속 중독 원인을 노동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탓이라고 여겼다. 해밀턴은 미국 최초로 설립된 직업병 조사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갔으며 납, 이황화 탄소, 일산화 탄소, 각종 분진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밝혔다. 해밀턴은 정부에게는 규제 법안을, 사업주에게는 작업환경 개선을 촉구하여, 관행과 법을 바꿔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건강 개선에 영향을 미쳤다. 태동하고 있던 직업 의학은 앨리스 해밀턴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으며, 과거부터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김보민 기자 / 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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