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의 시대에서 바라본 노인의학 –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님 인터뷰

전례 없이 평균 수명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이 노화의 시대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를 만나 노인의학에 관한 깊은 대담을 나누어보았다.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39) 교수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내과 분야에서 의학석사 학위를,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의과학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바 있다.

노년내과라는 다소 생소한 분과를 선택한 이유를 묻자 정 교수는 여타 인터뷰와는 사뭇 다른 답변을 들려주었다. 이제까지 대중을 향한 인터뷰에서는 약을 하나 뺐더니 호전되는 환자를 보며 흥미가 생겼다고 말해 왔지만, 의대생들에게는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원래부터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고 싶었다”던 정 교수는 유명한 미국 의학 드라마인 “ER”, “House” 등을 예시로 들며 다양한 세팅에서 환자를 돕고 문제를 풀어간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가정의학과, 응급의학과 등도 고민했지만 약리학과 생리학이 재밌어서 내과를 택한 것이다.

본과 2학년 때 약리학을 공부하다 약물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처방 캐스케이드(prescribing cascade)에 관심이 생겼으며, 취미인 호른을 연주하다 근육 생리에 흥미가 생겨 근감소증을 공부한 것이 노인의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본과 3학년, 처음 실습을 나간 노인 병동에서 제너럴리스트의 입장으로 접근하는 총체적인 진료가 재밌어 보였다던 정 교수. 결국, 통상적으로는 레지던트 2년 차 때 선택할 수 있는 분과에 포함되지 않아 왔던 노년내과를 전례 없이 선택하여 노년내과를 지망한 최초 전공의가 되었다.

 

노인의학이란?
노인의학이란 사람마다 시간에 따른 노화의 정도가 전부 다르다는 점을 중심으로 노쇠 정도, 기대 여명, 기능 상태에 맞춘 치료 목표를 세움으로써 환자 중심 의료를 행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노인 증후군이다. 노인 증후군이란 특정한 질병이 아니라 노인 환자의 생체 시스템에 축적된 손상이 몸의 다양한 기능에 영향을 주어 나타나는 증상이다. 낙상, 불면, 치매 등이 이에 속하며, 눈에 보이는 증상들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신체 시스템을 보면서 여러 원인 중 치료 핵심을 찾아야 한다는 게 특징이다.

일례로 치매 환자에서 증상에 대한 치료만 지속하면 복용하는 약제가 과도하게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노쇠, 사회적 고립, 우울 등 여러 이유 중에 해당 환자의 치매를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으면 더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치료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력은 결국 노인의학적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노년내과의 역할
노년내과 의사의 주요 업무와 역할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는 크게 임상 업무와 시스템 수립 업무로 나눌 수 있다.

외래에서의 주요 임상 업무는 다발 질환이 동반된 환자를 돌보며 노쇠, 근감소증 등 노인증후군을 진료하는 것이다. 그중 환자의 다약제를 정리하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노인 환자의 경우 만성질환을 포함하여 여러 질병을 복합적으로 앓는 경우가 많다. 만약 각 질환별로 다른 병원에 다니게 된다면 복용 약이 중복되거나 상반된 약제가 처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다약제 환자의 약을 정리하는 것이 노년내과의 중요 업무이다. 이 밖에 영양사, 약사, 재활치료사,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병원 직종과 협업을 통해 환자 맞춤형 치료를 진행한다.

노년 내과 의사의 또 다른 역할은 노인 환자가 좋은 기능상태에 도달해 퇴원할 수 있는 연령친화의료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현재는 급성기 입원 환자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개발, 제공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노년 환자는 다른 환자에 비해 회복 속도가 느리고 합병증 발생률이 높다. 서울아산병원은 노년 환자 증가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자 2020년 9월부터 노년내과, 재활의학과, 간호부, 약제팀, 사회복지팀 등 다학제 팀으로 구성된 시니어환자위원회(AMCS)를 발족해 노년 환자에 특화된 진료 지원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또한 맞춤형 진료 및 중재를 위해 노년 환자가 겪을 수 있는 복잡한 문제들을 환자의 요구사항(what Matters), 약제(Medication), 정신건강(Mentation), 거동(Mobility)으로 분류한 ‘4M’ 개념을 도입했다. 이 밖에도 퇴원 지원 시스템을 통해 재활치료, 사회복지서비스 연계 등을 지원하고 있다.

 

노년내과의 수련과정
노년내과의 수련 과정은 국가마다 다르지만, 영국과 미국의 경우 가정의학과나 내과 수련 후 1~2년 동안 추가로 노인의학을 배우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노인의학에 중요한 노쇠, 노인증후군, 돌봄 연계, 다약제 사용 정리 등과 더불어 일정 수준 이상의 신경과, 정신과, 재활의학과적 지식을 익히게 된다.

정 교수는 이러한 수련 과정이 우리나라에는 아직 정립이 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정 교수 본인은 노년내과가 국내에 거의 없던 시점에서 길을 개척하다시피 하며 내과 전공의로서 종합적인 지식을 쌓고 수련한 후, 석사 과정에서 역학(epidemiology) 연구를 마치고 분자생물학 관련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여 제너럴리스트로서 수련했다.

그러나 노년내과가 대부분의 병원에 부재한 지금, 노년내과뿐만 아니라 노인의학 전반의 수련과정은 미정이기에 이를 어떻게 정립할지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중환자 세부 전문의처럼 여러 과를 배운 후 가능케 할지, 혹은 영국처럼 넓은 개념에서의 노인과를 구축할지, 내과 안에서 노년내과 분과 전문의를 만들지는 미정이다. 깊은 생각과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문제다.

 

노년내과의 보람과 고충
노년 내과 업무에서 오는 보람은 어떤 것이 있을까? 정 교수는 “환자 자체를 봐야 하는데 질병만 국소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찾지 못한 것을 진단해 내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작년부터 보험 급여 범위가 대폭 확대된 SGLT2i가 노인 환자에게 처방되는 경우가 많은데, 노령의 환자가 이 약을 먹으면 체중이 과도하게 감소하는 부작용이 흔히 있다고 한다. 즉각적인 효과나 당면 질병만을 보고 내린 처방이 오히려 총체적으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환자의 처방을 재평가하면 의료비용도 감소하고 환자의 상태도 급속도로 호전된다고 한다.

반면 노년내과 업무의 고충도 있을 것이다. 정 교수는 노인의학을 하려면 내과 전반의 내용을 숙지하고 신경과, 정신과, 재활의학과 등 또한 지속적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학습량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이 높다는 점 또한 고충이다. 다른 과의 진료는 대부분 질환이나 진단, 처방이 정해진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므로 알고리즘화할 수 있지만, 노년내과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체중감소와 같은 증상은 가능 원인이 너무 다양해서 진단해 내기 어렵기 때문에 수많은 가능성을 확인해야 하고, 그렇게 해도 진단의 불확실성이 높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년내과는 전문성이 낮을 거라는 편견이 아직 의료계에서도 팽배하다고 한다. 특히 전문의의 비율이 매우 높은 한국에서는 환자 중심 진료를 하는 제너럴리스트의 임상 역량이 낮다는 인식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노인의학의 현주소
영국은 1940년대, 미국은 1950년대, 캐나다는 1970년대에 노인의학의 개념을 도입했다. 특히 영국은 노인의학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지하여 ’노인과(geriatrics)’라는 큰 범주 안에 노년내과, 노년 응급과 등의 분과를 운영하고 있다. 아직 노인과 전문 수련 과정이 없는 우리와 달리 노인의학을 전공하는 전문의가 존재하며, 전체 내과의의 10%가 노인의학을 선택한다.

한국의 노인의학은 갈 길이 멀다. 정 교수는 가장 큰 장벽으로 의료 분절화를 유도하는 시스템에 주목했다. 우리나라는 검사, 진찰, 약제 처방 등의 의료서비스 각각에 대해 정해진 가격인 수가를 책정하여 진료비를 합산하는데, 이때의 수가는 대부분 원가 미만의 낮은 금액이다. 따라서 병원 측에서는 한 명의 환자를 한 명의 의사가 총체적으로 진료하는 것보다 여러 분과별로 분절하여 진료하는 방식으로 적자를 메우게 된다.

일차의료의 부재 또한 의료 분절화의 원인이다. 우리나라는 전문의가 각 분과를 진료하는 이차의료가 우세한 대신 주치의가 진료하는 일차의료는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다. 따라서 다양한 만성 질환을 가지고 있는 노인 환자들은 각 질환별로 여러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게 된다. 하지만 분절화된 진료로는 복용하는 약제 종류와 의료 비용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고, 여러 원인이 혼합된 노인 증후군의 근본 원인에 대한 중재가 이뤄지기는 어렵다.

 

노인의학의 미래와 의사의 사회적 책임
노인의학의 현주소를 개선하기 위해서 정 교수는 단순한 노년내과 증설보다는 다양한 세부과와의 접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즉, 전반적인 의료 시스템이 고령자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환자를 중심으로 한 일차의료와 이를 통한 노인 통합의료를 강조했는데, 이는 최근 떠오르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 개념과 관련된다. 실제로 일본은 일찍이 2014년부터 의료개호일괄법을 제정하여 지역 내의 의료제공체제를 구축하고 지역포괄케어시스템을 도입했다.

정 교수는 노인의학 분야에서 본인을 포함한 동료와 후배 의사들의 책임은 잘못된 시스템을 고치는 데 앞장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늦어도 2030년까지 노인의학 시스템을 도입하지 못한다면 의료비는 무한 증식할 것이다. 고령화와 더불어 젊은 세대가 더 빠르게 노쇠하면서 전체적인 의료비용이 증가하고 노년기 침상 생활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정 교수는 진료와 연구로 바쁜 와중에도 방송, 도서, SNS 등을 통해 활발히 활동하며 노인의학을 알리고 있다. 우리나라 또한 저속 노화를 해야 하고, 관련 전문가들이 앞장서 변화의 물꼬를 틀어야 한다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다.

 

노화의 시대가 코앞으로 다가온 현대 사회에서 노인 의학은 이제 선택의 문제를 넘어선 필수가 되었다. ‘느리게 나이드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 그 시작에 노인의학이 있다.

 


기획기사 A팀(김민서, 김효찬, 오예지, 이애진, 이은수, 천소현)

 

 

#노인의학#정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