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연료 – 제7회 한국의학도수필공모전 수상작 [동상]

동상

:: 서울대학교 의학과 1학년 정한별

삶의 연료

 

요양 병원에 다녀올 때면 마음이 영 좋지 않다. 방문객이 편히 앉을 수 있는 의자 하나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병원 시설과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의 간병인. 불청객으로 이 자리에 눌러 있다는 무언의 압박을 감지하고 자리를 뜰 때면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거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외할머니의 눈빛. 그리고 간만에 보는 젊은 남자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다른 할머니들의 시선.

졸업을 앞두고 고정된 일정이 거의 없던 내게는 마침 가용한 시간이 많았다. 덕분에 그 무렵 집으로 모시게 된 할머니를 돌볼 수 있었다. 부모님과 시간을 분배한 나는 그 중에서도 아침과 이른 낮을 맡았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 밥을 차리고 난 뒤에는 할머니가 밤새 입고 있던 기저귀를 갈아 입혔다. 그리고는 서투르게 실수해 놓은 변기 주변을 포함해 화장실 청소를 했다. 다시 점심을 준비할 즈음이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와 자리를 교체해 외출한 뒤 취업 준비를 했다.

나는 마음을 가진 인간의 존재를 철썩 같이 믿어왔다. 사람의 어딘가에 이성으로 제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그래서 애정이나 고통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발가락 끝에 매달려 귀찮게 덜렁거리는 헛살처럼, 내 의지와 상관 없이 통증으로 실토하게 되는 인간의 실존. 그런 것들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많은 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증세가 깊어짐에 따라 할머니는 마음 역시 조금씩 잃어갔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먹을 것을 좀처럼 양보하지 않았고, 조금 더 사나워졌다. 이미 다녀온 화장실을 무시로 드나들고 이미 마친 식사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할머니는 부쩍 초조해했고 쉽게 지쳤다. 여전히 순했지만 더 이상 세상에서 가장 순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토록 가까이에 있는 개인적 종말을 애써 외면하면서 나의 젊음을 주장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성이 선택한 적 없는 계기와 시점에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어쩌면 인간이 철저히 단순한 물성의 조합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모든 것이 머리에 있는 것 같다는 항복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무심히 쓰다 버리는 수많은 소모품처럼, 인간 역시 그렇게 태어나 조롱 받다가 허망히 떠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천성이 게으른 데다 걸핏하면 물건을 잃어버리는 등 제 몸 하나도 건사하지 못하는 나였지만, 더욱 오기를 부렸다. 그건 나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스스로도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매 순간 생존 본능을 거꾸로 거스르는 것 같았다. 효도하지 못해 깊깊이 맺혀 있던 한을 이제야 조금씩 푸는 기분이라고 했다. 우리는 할머니가 걷잡을 수 없이 미워지는 순간 겸허히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그렇게 나와 우리 가족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했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취업 준비를 그대로 그만두었다.

할머니를 더 이상 우리 집에 모실 수 없게 된 건 내가 의대에 합격해 기숙사에 살게 된 탓이 컸다. 아이러니했다. 첫 시험을 마치고 찾아간 요양 병원 한 구석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보며 나는 끊임 없이 자책했다. 사실 합리적이지 못한 죄의식었다. 회사원이 되든 다시 한 번 학생이 되든 나는 신분의 경계면에 서 있었고, 그러니까 할머니는 결국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나야 했다. 이미 잘 이해하고 있었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만 선택이란 건 도무지 미리 알 수 없는 만큼의 무게를 갖기 마련이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일이 더 터졌다. 조금씩 마음을 수습해가고 있던 즈음이었다. 이번에는 엄마의 몸이 고장 났다. 살이 마구 빠지더니 급기야는 걱정스러울 만큼 온 몸에 부종이 생겼다. 반드시 아프다는 뜻이었고, 적어도 평범한 무언가는 아니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결국 골수 검사가 이어졌다.

온갖 시나리오를 상상해 본 나는, 필요하다면 미련 없이 휴학하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러한 다짐이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 절감했다. 골수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함께 병원으로 향하던 날 나는 도무지 긴장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진료 직전이 되자 거의 온 몸이 후들거릴 지경이었는데, 그 긴장감 속에는 치기 어린 이기심이 끼어 있었다. 엄마의 건강을 염려하는 80퍼센트쯤의 감정 사이를 비집고 나온 두려움이었다. 앞으로 걷잡을 수 없이 펼쳐질 불확실성에 대한.

괴로웠다. 어리지 않은 나이에 결심이랍시고 다시 한 번 공부를 시작한 내가 무언가를 자꾸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학교 밖으로 나갔어야 했다. 돈을 벌었어야 했다. 집을 지켰어야 했다.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가정들이 끊임 없이 나를 짓눌렀다. 내 선택으로 인해 더 이상 함께 지낼 수 없게 된 할머니, 그리고 평생 몸이 부서지도록 가족을 뒷바라지 해온 끝에 결국 몸이 고장 나 버린 엄마까지.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땔감 삼아 내 삶을 연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족에 대한 연민,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나를 괴롭혔다.

실마리를 얻은 건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건 단 한 마디 말 때문이었다. 나는 군것질 거리를 전해줄 겸 같이 밥을 먹자며 기숙사에 찾아오겠다는 엄마를 뜯어말렸다. 조금만 걸어도 온통 부어오르는 두 다리가 걱정스러웠다.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두세 시간씩 오갈 엄마를 상상하니 조금 답답한 마음마저 들었다. 나를 챙기기 위해 멀리까지 수고스럽게 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고, 그렇게 우리는 팽팽히 맞섰다. 잠시 머뭇거리던 엄마가 말을 이었다.

 

“…보고 싶어서 그래.”

아무런 겉치레도 없이 덩어리째 던져 놓은 엄마의 진심에 말문이 막혔다.

엄마의 주권을 자꾸만 나의 시선에 굴절해왔음을 깨달았다. 내 감정에 사로잡혀 펼쳐 놓은 드라마에 엄마를 제멋대로 끌어들여 간편히 대상화하고 연민해왔던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엄마를 장작 삼는 일이었다.

언젠가 캄보디아로 함께 떠난 여행에서 현지인들을 가엽게 여기며 팁을 마구 얹어주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든 게 좋았던 여행이었지만 그 한 가지만큼은 끝내 탐탁치 않았다. 나는 엄마의 그러한 행동에 동의할 수 없었고, 우리는 결국 내내 입씨름을 해야 했다. 자신의 터전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경작해가는 타인을 불쌍한 존재로 단정하는 것이 싫었다.

정작 나는 스스로가 비판하던 행동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었던 셈이다. 선의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종당에는 무례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엄마에게 엄마의 순간이 있었음을, 그리고 내 삶의 주변부에 눌러 앉아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음을, 나는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게 내 삶이 아닌 엄마의 삶을 존중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날 우리는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적당히 기쁘고 슬픈 밤이었다.

 

…똑바로 살고 있는 걸까. 혹시 내가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소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나를 사로잡았던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은 적이 별로 없다. 애초에 답을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 뼘인가 자라 있을 때쯤이면 이미 더 이상 그것이 궁금하지 않게 되거나 심지어 지루하고 유치한 주제가 되어버리곤 했다.

그렇지만 최근 몇 달의 체험은 나에게 적어도 몇 가지 힌트를 준 것 같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문제의 합답성을 따지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즘 부쩍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엄마를 지겨울 만큼 자주 보고, 깊이 사랑하고, 또 서로에게 불 같이 화내는 것이 어쩌면 유일한 답인지도 모른다. 끝내 헤어져야 하는 할머니이지만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듯. 그게 어느 누구도 땔감 삼지 않고 겨울을 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는 조금 더 기다려보는 거다. 지금 나에게 응답하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이 천천히 나의 발치에 닿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