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떨리는 손으로 당신의 손을 다시 잡을 수만 있다면 – 제7회 한국의학도수필공모전 수상작 [은상]

은상

:: 충남대학교 본과 3학년 최태양

이 떨리는 손으로 당신의 손을 다시 잡을 수만 있다면

가을의 끝자락에 밤나무에서 툭하고 밤송이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그렇게 당신의 시린 생도 툭 하고 떨어졌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나에게 큰아버지는 말 그대로 커다랗게 다가왔다. 힘든 시절을 살아가던 나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똑똑한 장남이었던 큰아버지는 마산에서 내로라하는 은행의 지점장을 지낼 정도로 잘 나가시는 분이었다. 똑바로 서도 아빠의 허리춤에 겨우 닿을락말락했던 내가 보기에 큰 아버지는 아빠가 매일 같이 입던 낡은 평상복이 아닌 살아있는 바지선과 화려한 넥타이를 한, 한눈에 봐도 눈에 띄는 멋진 옷을 입고 있었고, 꿉꿉한 반 지하 곰팡이 냄새에 익숙했던 내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숨에 십 몇 층을 올라가야 하는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꿈같은 사람이었다. 어린 마음에 가지고 싶은 것을 맘껏 가지지 못한 나는 항상 사촌 언니, 오빠가 부러웠다. 명절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큰집에 들르게 될 때마다 보게 되었던 사촌언니의 방은 어떤 쇼윈도보다도 더 반짝반짝 빛이 났었다. 어쩌다 한 번 다녀갈 때, 두고 가시는 선물 하나, 용돈 얼마가 나에게는 한없이 귀했고, 그 귀함을 주는 큰아버지는 내가 항상 올려다 봐야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사람은 서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서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마산을 떠나 외가 친척들이 살고 있는 안산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잘 살고 계신 형님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아버지의 하나뿐인 형님은 그 손을 끝내 잡아주시지 않으셨다. 겉으로 강해보이시는 아버지였지만 함께 자란 동기의 외면은 못내 섭섭해 하셨고, 그로 인해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사이에 메워지지 않는 감정의 골이 생겨버렸다. 어린 내가 가족의 생활고를 알리 만무했고, 그저 큰아버지의 가족을 부러워만 했던 철부지 장녀가 두 형제의 사연을 알게 된 것은 몇 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인생이 쉽기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크기만 했던 사람이 내가 훌쩍 자라서인지, 얻게 된 병 때문인지 계속해서 작고 낮게 움츠러들었다. 큰아버지는 나라의 큰 경제위기가 있을 무렵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게 되었다. 그 이후로 겪게 된 마음의 병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큰아버지는 파킨슨병이라는 당시엔 생소했던 병을 진단 받았다. 건장하던 어깨는 한없이 약해지고 떨리는 손은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뻣뻣해진 관절로 인해 넘어지기가 일 수였으며, 변해버린 자신의 신체에 대한 괴로움으로 감정 변화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만큼 괴롭진 않았겠지만, 가족들 역시 그 고통을 나눠지고 있었다. 믿음직한 가장에서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파킨슨병 환자를 위해서 가족들의 역할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고상한 사모님에서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된 가장의 역할로 억척스럽게 변해버린 큰어머니, 부러워마지 않았던 사촌 언니, 오빠도 힘겹게 삶을 지탱해 가고 있었다.

자신도 원했겠냐마는, 그렇게 가족에게 커다란 하늘에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되어 버린 큰아버지는 자신이 사랑했던 딸이 어여쁜 딸을 낳던 날, 그리 기분이 좋아 그 밤에 뒷산에 올라가서 밤송이를 따셨다. 다음날 손녀딸을 보러간다는 기쁨에 굳어진 다리와 떨리는 손을 더는 가누지 못했던 당신은 갑자기 툭하고 떨어져버린 밤송이 마냥, 세상에서 툭 떨어졌다. 가족의 경사가 있던 그 날, 스산한 바람이 부는 뒷산에서 큰아버지는 끝내 자신의 첫 손녀를 마주하지 못하고 떠났다.

가족이란, 한 핏줄이란 그런 것일까. 잊지 못할 것만 같던 그 감정의 깊은 골은 형님의 비보를 들었을 때 메워져 아버지를 어릴 적 큰 형을 따르던 손아래 동생으로 돌려놓았다. 경상도 남자 특유의 큰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가족을 위해 항상 강한 모습만 보여 왔던 아버지의 너른 등이 3년 먼저 태어났음에도 한참을 먼저 보낼 마지막 형님을 마주하고선 들썩거렸다.

장례식을 치른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버지는 큰아버지의 유품을 정리 하셨다. 사실 유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없었다. 사진 한 장과 한참은 철이 지난 손바닥만 한 다이어리 한 권. 사진 속에서 큰 아버지는 병을 앓고 난 후 그렇게 표정의 변화가 없었던 얼굴에 간만에 띠어진 미소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바짝 말라버린 몸이지만 요양원에서 열린 노래 대회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선 당신의 모습에서 오랜만에 이 풍진 삶의 작은 행복이 보였다.

그리고 작은 수첩. 끝내 아버지는 주름진 눈가 사이로 눈물을 보이셨다. 형님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그 네모나고 흰 작은 공간에는 매일 밤낮으로 외로웠을 당신의 감정이 점점 작아지는, 그리고 떨리는 글씨체로 오롯이 담겨져 있었다.

‘힘들다’

‘외롭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런 글 들 사이에서 한 페이지에 나의 손길이 닿았고, 한 동안 멍하니 그 서투른 문장을 마주하며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이 떨리는 손으로 당신의 손을 다시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작은 수첩은 당신의 유언장이자, 당신의 사랑에게 보내는 마지막 고백이었을지도 모른다. 삶의 풍파에 짓눌려 편안하지만은 못했던 관계에서 큰아버지의 그 못 다 이룬 소원은 비록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리고는 있지만 그 손으로 아내의 손을 단 한 번만이라도 잡아보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내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 떨렸던 그 떨림은 아닐지라도, 이 힘든 생의 단 하루만이라도 따뜻하게 이전의 그 사랑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끝내 외면했던 동생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아니었나 싶다. 매몰차게 뿌리쳤던 동생의 손을 이제나마 돌이켜 잡고 싶었을 수도 있다. 비록 그 때만큼 대단한 손은 아닐지라도, 내 몸을 가누지 못해 바로 서기 힘들지라도 이제야 미안했다며 내미는 떨리는 화해의 손은 아니었을까.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산을 우러러보던 철부지 꼬맹이는 산이 모래 언덕마냥 흐트러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본과 3학년 학생이 되었고, 신경과 실습을 돌면서 내 기억 속의 큰아버지를, 작은 사람이 되어버린 당신들을 병원에서 마주했다. 가만히 있어도 절로 떨리는 저 손도 누군가의 손을 간절히 잡고 싶었을 것만 같았다. 실습이 끝나도록 끝끝내 내밀지 못한 못난 손이지만, 언젠가 당신의 떨리는 손들을 한번쯤 내가 먼저 내밀어 따뜻하게 잡아드리고 싶다. 결국 잡아 드리지 못한 큰아버지의 손을 대신해서.

 

+++소감+++

이 떨리는 손으로 다시 글을 쓰기까지

작년에 귀중한 상을 받고, 올해까지 글을 쓴다는 것이 제게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은 격으로 상은 받긴 했지만, 시상식 당일에 만난 다른 수상작을 보면서 제가 쓴 부족한 글로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쓰고 싶은 글은 많았지만 한 줄 한 줄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더욱더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글만 모니터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동안은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니 글을 쓰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신경과 실습을 돌면서 파킨슨 환자들을 만나면서 큰아버지의 이야기가 쓰고 싶어졌습니다. 1년 반 전에 돌아가신 큰 아버지의 이야기는 항상 쓰고는 싶었지만 차마 못쓰고 있었던 이야기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굳이 잘 쓰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느꼈던 상황, 감정, 내 기억에 온전히 집중했습니다. 집에서도 쓰고, 실습을 돌다가 쉬는 시간에도 쓰고, 기차 안에서도 썼습니다. 조금 오래 걸렸지만 완성된 글을 마주했을 때는 잘 쓰고 못 썼는지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문법적인 오류나 문맥 맞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지만 내 감정과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써 내려갔다고 생각하니 그 후로 더 이상 글을 쓰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분명 저 말고도 글 쓰는 것이 두려운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공모전이나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이라면 더욱더 그러리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퇴고를 하고 평가를 받는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올해도 시상식이 끝나고 이런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상자 분들께서도 제가 느꼈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수상을 하지 못한 학우들은 자신의 글을 못 쓴 글이라고 자책할 수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저의 떨리는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글 쓰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가족의 관찰자이기만 했던 제가 그동안 느꼈던 저의 마음을 이렇게나마 아버지, 어머니께 전해 드릴 수 있게 이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남은 날들을 잘 쓰지는 못해도 마음에 남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