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글쓰기 – 제7회 한국의학도수필공모전 수상작 [동상]

동상

:: 조선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3학년 신제윤

최초의 글쓰기

이른 아침, 밥솥에 밥을 얹혀놓은 뒤 틀어둔 라디오에서 빗물처럼 핑크플로이드 음악이 흘러나오는 날쯤 되면, 그날은 어김없이 내 방에 손님이 방문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손님은 내가 무언가에 바빠서 스스로에게서 멀어진 날에는 오지 않고, 어쩌면 조금은 흐린 날에, 어쩌면 조금은 침전된 날에 나의 안식처로 슬그머니 걸어온다. 그는 안개 낀 숲속의 좁고 좁은 오솔길을 지나고, 시냇물과 주변의 다홍빛 풀꽃들을 건너서, 내 깊숙한 곳에 비밀처럼 숨겨놓은 오두막의 작은 문을 노크한다. 중절모와 어둑한 회색 외투를 걸친 그 손님은 앞으로 다가올 내면의 거친 투쟁을 예고하며 내게 작은 악수를 건네온다. 그렇게 나는 하루를 시작하였고, 그렇게 나는 ‘삶’이란 쓸쓸한 손님과 마주하곤 했다…

 

– ‘아빠 나는 작가가 되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지리산의 경비원이 되겠어.’ 대학교 4학년, 의학전문대학원 준비 입시학원에서 돌아온 24살의 나는, 어둑한 현관에서 부모님에게 이 한 마디를 편지처럼 통보했다.

어릴 적부터 의사를 업으로 생각한 것은 사실 내게 그다지 이유를 붙일만한 것이 못 되었다. 세상에 나온 때부터 의사로 생활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랐고, 맞벌이를 하신 부모님이 유년의 나를 맡긴 곳은 중곡동에 있던 할머니의 개인병원이었다. 학교 교실과 사춘기 학생들의 병적인 낙서로 가득했던 흰 벽지의 보습학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들을 대학은 내게 유쾌한 웃음으로 소개해주었고, 나는 그중에 운명같이 문학에 빠져들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소설과 철학책들에 빠져들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자연이 내게 부여한 수줍고 내성적인 기질도 한몫을 했을 것이고, 손목시계밴드의 첫 구멍으로도 헐렁한 나의 희고 얇은 손목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작가가 자신의 영혼을 담아낸 책을 읽으면서, 나의 내면에 은밀하게 숨겨두었던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감각들을 사실은 그들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세상 속에서 내가 갖던 이질감과 고독감이 옅어지며 마치 오랫동안 그리던 친구를 만나게 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삶에 대한 몇 가지 질문과 의미에 대해 작가들은 그들만의 이야기를 풍경으로 보여주었다.

그 시절에 나는 강의가 끝나면 공원과 한강을 산책하고, 음악을 듣고, 햇볕이 드는 벤치에 골라 앉거나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작가들이 섬세하게 다듬어낸 글과 영혼의 감수성을 느끼며 전율했고, 그때마다 나는 나도 작가가 되어 이런 글을 써보겠노라고 하늘을 바라보며 굳게 다짐하곤 했다. 그렇게 대학교 4학년, 작가가 되겠다는 현관문에서의 선언과 함께 나의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 그리고 2년 후 26살, 나는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내게 모니터의 흰 문서공간을 채울 능력이 부족하단 걸 깨닫는 데는 1년이면 충분했다.

 

나는 나의 기질이 환자를 진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고, 동시에 의사의 일을 통해 내 삶에 대한 구도의 방향이 더욱 명확해 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대학원을 다니고 의사의 일을 하게 되면서, 나는 내면과 그 내면을 비춰줄 글을 점점 완성해 나아가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 잘못된 생각이었다.

의대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칠고 바빴다. 엄청난 양의 공부와 시험은 나에게서 감수성을 앗아갔고, 나는 술자리에서 춤추는 상황을 피하는 일에 기력을 소진해나갔다. 섬세한 감수성이나 하루를 반추하는 자세는 유급 앞에서는 에너지의 불필요한 소모였고 서서히 내게서 사라져갔다. 사람들 속에서 적당한 자세를 취하는 것과 새로이 떠도는 시험에 대한 정보를 놓치지 않는 것을 위해서는 예민함의 칼날을 무디게 해선 안 되었고, 온화한 산책과 세심한 배려심조차 내게는 점차 버거운 사치가 되었다. 생명을 다루는 의학의 많은 정보를 정확하게 습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해야만 했었다.

나는 더 이상 헤르만 헤세의 구원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고, 우울한 내게 밤새 웃음을 주었던 도스토옙스키의 광기도, 니체의 규정 파괴적인 생각도, 즐겨듣던 김광석의 목소리도 내게 울림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침대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자괴로 새벽 밤을 지새우는 날도 없어졌고, 잿빛 코트를 걸친 그 ‘손님’도 더 이상 내 오두막의 문을 두드리려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2년간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았다.

 

– 그렇게 28살, 나는 3학년이 되었고 병원 실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병원의 실습 생활 역시 내게 예민함과 긴장감을 놓도록 허락해 주지는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 사람의 생명을 대하는 업에 임하는 삶에서, 예민함과 긴장감의 자세는 평생을 곁에 두고 지내야 할 소양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습을 돌면서 과거의 내 모습을 멋지게 되찾았다고 말하면 좋았겠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그동안 질병이 책과 그림으로 존재했다면, 이제는 질병이 바로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존재한다는 점이 나를 조금씩 변하게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처음 외래 실습에서 느낀 환자들의 모습은 완전한 ‘타인’ 이었다. 나는 진료실의 교수님 뒷자리에 앉아 있었고, 환자는 교수님 앞에서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였으며, 우리는 서로가 처음 보는 ‘타인’으로써 질병을 사이에 둔 채 낯설게만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나 환자를 직접 문진하는 기회를 얻고, 그 환자의 수술에 참관하며, 어느 날은 내가 진료실의 환자 자리에 앉으면서, 환자와 질병에 대해 나는 조금씩 생각이 변하게 되었다. 어떤 과는 회진을 돌면 의식이 있는 환자가 오히려 드물었다. 나는 의견을 조율해야하는 상황에서 사람을 대하는 일이 시험보다 더 정답이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집에서는 내 실습을 위한 가상 진료실 속에서 아버지가 머리가 아픈 모의 환자 역할을 맡으셨다. 그날 나는 진료실 속 환자로 변한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의 얼굴을 성인이 되어 처음 만져보았다.

나는 과거의 내가 세상을 느꼈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점차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느낌이 든다. 스무 살 초반의 나는 문학에서 삶을 찾아다녔고, 조금은 고립된 채, 조금은 순수하게,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았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나는 이제 예전처럼 소설책을 읽고 글을 쓰는 마음의 여유는 갖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의 생활은 내가 삶을 좀 더 현실에서 찾는 과정이 되어주고 있다. 이때 내가 길을 잃고 괴물이 되지 않도록 과거 나의 기질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고 있고, 하늘을 바라보는 지친 날에는 내게 방향을 알려주는 별이 되어주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제, 방문이 뜸했던 ‘손님’은 멀리서부터 오솔길을 걸어와 다시 한번 나의 오두막 문을 두드렸고, 4년 만에 새로운 나는 최초의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