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에서 만난 역지사지 – 제7회 한국의학도수필공모전 수상작 [금상]

금상

:: 충남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4학년 지상윤

병동에서 만난 역지사지

 

초등학교 때, 별다른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 참 많이 뛰어 놀았다. 유일하게 공부라고 하면 학교 입학과 더불어 시작한 한자 공부뿐이었다. 부모님은 우리나라 말이 한자어가 많고, 한자를 알면 뜻을 금방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다.

매일 학습지 두 세 페이지를 풀며 힘들이지 않고  한자를 익혀나갔다. 나름대로 단계가 높아져서 사자성어 등을 공부할 때였다. 어머니께서 종이에 네 글자를 큼직하게 써서 주셨다.

 

易地思之.

 

“이건 엄마가 살아가는 기본 원칙 같은 거야. 좌우명이라고 할까.

엄마가 너보다 조금 더 인생을 살아보니까

이 말처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정말 필요한 것 같아.

그러면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은 별로 없을 거야”

 

그 때로서는 어머니 말씀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러나 정말 학년이 올라가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면서 이 말이 생각나는 일이 자주 생겼다. 다양한 유형의 친구들과 더 다양한 사연이 깃든 갈등을 겪을 때, 돌아서서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화가 많이 누그러졌다. 먼저 사과를 해도 부끄럽거나 자존심 상하지 않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덧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길, 의학도의 길에 들어섰다. 대학입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힘든 1,2학년 본과 공부가 끝났다. 이윽고 3학년이 되어 병동을 돌며 실습을 하게 되었다. 산부인과를 거쳐 드디어 혈액종양내과. 가슴이 떨렸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 실습 전 날에 잠을 설쳤다.

 

아버지는 내가 첫돌을 막 지나고 났을 때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으셨다. 박사학위를 받으시던 졸업식장이 눈물바다였다고 한다. 그래도 힘든 화학치료를 마치시고, 대학 교수가 되셨다. 하지만 첫 발병 후 4년 만에 재발해서 골수이식을 받으셨다. 그러나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세 번째로 발병한 급성백혈병 때문이었다. 막 사춘기를 시작하려던 무렵이었는데, 그 후로 사춘기의 ㅅ자도 펼쳐보지 못하고 지났던 것 같다. 실습을 하면서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았다.드디어 혈액종양내과 실습이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마음이 차분하고 담담했다. 아버지도 이런 검사 과정을 거쳐 진단을 받으셨겠구나. 이렇게 힘든 치료를 견뎌 내셨던 거야…. 아버지 생각에 잠깐잠깐은 숙연해지기도 했다.

 

실습이 한창이던 어느 날 오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때처럼 봄꽃이 아름답던 날이었다. 병동 실습을 마치고 나오는데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꼬맹이가 진료 대기실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냥 지나치면서 곁눈으로 보니까 조금 특이했다. 조립 블록을 너댓개 들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블록을 조립했다가 다시 해체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내 기억은 일곱 살 때 어느 날로 돌아가 있었다.

아버지가 골수이식을 받으시느라고 부모님은 병원에서 반년을 넘게 계셨고, 나는 고모 집과 외갓집을 전전하며 유치원을 다녀야 했다. 그 무렵 나는 ‘피’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유치원이고 집에서고 자꾸 높은 곳에 올라가 밑으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선생님이나 친척들이 그런 나를 잘 다독여주어서 더 이상 심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후에 말씀하시기를 아마 일곱 살이던 나로서는 대략 집안 분위기를 알았을 것이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것이 스스로의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이었을 거라고 하셨다. 무섭지만 그래도 무사히 내려왔다는 안도감을 확인하는 연습이었을 거라고….

병동 앞의 그 꼬마가 하는 반복적인 행동에 일곱 살의 내가 겹쳐 있었다.

역지사지!

 

난 그 애의 마음을 설명할 것도 없이 알 것 같았다. 그냥 가만히 그 애 옆에 앉았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 그 애에게 말을 붙였다. “재미있어? 잘 하는데? 나도 해볼 수 있을까?”

우린 그냥 한참을 그렇게 놀았다. 멀리서 꼬마 엄마가 오시는 게 보였다. 나는 일어서서 나오면서 꼬맹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언제나 잘 할 수 있어. 지금도 잘 하고 있어”라고.

 

그건 어쩌면 일곱 살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정말로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저 잘하고 있는 거 맞지요?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요?

 

+++소감+++

상처는 잘 아물고 나면 더 이상 고통을 주지는 않습니다. 비록 흉터라는 흔적을 남기기는 하지만, 때로 그것이 추억의 실마리가 되고, 어떤 교훈으로 남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오랜 투병과 이른 별세는 제 성장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의 적성보다는 아버지를 닮고 싶은 마음에 사회과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의학을 선택할 때는 여러 가지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어린 시절에 겪었던 기억의 통증이 남아 있던 탓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제 한 학기를 남긴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제가 겪은 일들이 오히려 저에게 힘을 내게 하는 격려가 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생각의 틀이 되어 주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대신 많은 선생님들과 친구, 선후배들이 빈자리를 넘치도록 채워주었습니다.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는데, 제게는 모두가 제 스승이 되었습니다. 이번 수상이 제게는 아버지가 보내는 특별한 위로인 것 같고, 등을 두드려주시는 손길 같기도 합니다.한편으로는 더 넓은 세상으로 가는 튼튼한 이정표 하나를 주시는 것도 같습니다. 마음을 나누는 의사가 되라고 늘 말씀해주셨던 어머니,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께 수상의 기쁨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