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에서 절대평가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생 인터뷰

‘우리 예서 꼭 서울의대 보내야 돼요’

지난 겨울 대한민국을 강타한 드라마 <SKY 캐슬>에 나오는 대사이다. 드라마의 주인공 한서진은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딸 예서를 서울의대에 보내기 위해 자존심을 굽혀가며 이렇게 말한다. <SKY 캐슬>의 배경처럼 우리나라는 무한 경쟁 사회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경쟁에 익숙해져 있고, 성인이 되어서도 학점 경쟁, 취업 경쟁 등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자신의 상대적인 위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는 의대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매 시험마다 A부터 F까지 상대평가로 학점을 받고, 의대생들에게는 이 학점이 학생 시기에는 의학적 지식과 실력을 습득하기 위한 동기로, 훗날 인턴 지원이나 전공과 선택 시에는 평가 기준이 된다.

상대평가는 개인의 성적을 집단 내에서의 상대적인 위치로 평가하기 때문에 개인 간의 변별이 용이하고, 경쟁을 유도하여 학습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상대평가 하에서는 경쟁이 과열되어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교육의 패러다임을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능의 영어와 한국사 과목, 중학교 내신 등이 그 예이다. 흔히 절대평가에 관해서 Pass/Fail만을 절대평가로 규정하기도 하는데, 위에 언급한 예시와 같이 시험점수 자체를 기준으로 A~F의 학점을 부여하는 방식도 절대평가에 해당한다. 따라서 엄밀하게 따지면 대학교에서도 기존에 절대평가제를 실시하는 경우는 더러 있다.

하지만 모든 과목에서 절대평가제를 실시하고, 성적 산출 방식도 혁신적으로 전환한 의과대학이 있다. 지난 2014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은 모든 과목에 있어서 전면적으로 절대평가제를 도입하였다. 연세대학교를 필두로 인제대, 울산대, 성균관대 등 여러 의대에서 절대평가제 도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연세대학교는 또한 기존의 A+부터 F까지 9단계(+/0) 또는 13단계(+/0/-)로 구분했던 성적 산출방식을 H(Honor)/P(Pass)/F(Fail)의 3단계로 축소하였다. 시행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연세대학교는 지난 2014년에 절대평가를 도입한 이래로 2년간 높은 국시 합격률(2018년 98.4%, 2019년 94.3%)을 기록하며 졸업생을 배출했다.

절대평가가 시행되고 있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습은 어떨까? 절대평가가 시행되면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또 상대평가를 실시하는 학교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15학번으로 재학 중인 류형준 씨를 만나보았다.

 

절대평가로의 전환과 다양한 변화들

 

  1. 연세대 의대는 어떤 방식으로 성적을 산출하나요?
  2. 우선 학점은 기본적으로 P/F 형식인데, P 위에 H라는 학점까지 포함해서 3가지로 받게 돼요. H는 P를 받은 학생들 중에서 과목마다 상위 5% 정도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들만 뽑아서 주는 학점이에요. F는 P를 받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에 받는 학점이라 만약 받게 되면 유급을 해야 해요. 그런데 F를 받기 전에 ‘재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험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주거나, 오답노트를 쓰게 하는 등 구제의 기회를 줘요. 웬만하면 구제를 해주고, 3~4번 정도 기회를 놓치면 F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결과적으로 학기 말에 받게 되는 성적표에는 H와 P만 적히게 돼요.

 

  1. 재교육을 받게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2. 정확한 기준은 학생이라 잘 모르겠지만, 교수님들 말씀으로는 필수(essential) 문제들이 있는데 그 필수 문제 중 30% 이상을 틀리면 재교육 대상자가 된다고 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수 문제만 맞추려고 공부하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1. 자교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절대평가 성적이 잘 참작이 되겠지만, 만약 타대 병원을 지원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2. 이 부분이 약간 메리트인 것 같기도 한데, 교수님들 말씀으로는 P만 받아도 다른 병원에서 좋게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했다고 해요. 사실 그 부분은 아직 본과생이라 잘 모르겠어요. 들은 바로는 학교 내신 성적보다는 국시 성적이 많이 중요하다고 하네요. 그래서 오히려 국시 공부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어요.

 

  1. 의과대학 공부에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족보죠. F를 받지 않기 위해 족보만 딱 보고 시험에 응시하는 부작용은 없나요?
  2. 시험문제에 족보에 있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 만큼 그런 식으로 공부하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지 않을까요. 확실히 저희 학교가 다른 학교보다 더 유급을 안 하고, P를 받으면서 넘어가기에 편리한 시스템인 것 같네요. 그래도 P와 F의 기준을 학교에서 잘 유지하고 있어서 우려만큼 문제가 심각하지는 않아요. 저희도 유급생이 없는 건 아니었거든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학교에서 많이 의식적으로 수준을 조절하는 것 같아요.

 

  1. H는 상위 5%에게만 주는 학점이니까 일종의 상대평가처럼 보이네요. 경쟁 축소를 위해 절대평가를 도입한 건데, H를 받기 위해서 다시 경쟁이 생긴다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2. 상대평가가 어느 정도는 남아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꼭 몇 등 안에 들어야 H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H를 받았다는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어요. 성적이 공시될 때 석차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H를 받았는지를 서로 의식하면서 경쟁을 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함께하는 공부, 자발적인 공부

 

  1. 상대평가처럼 H라는 학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경쟁이 없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2. 모든 과목에서 H 없이 P만 받는다고 성적이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래서 전반적으로는 학업 부담을 많이 내려놨지만, 열심히 할 의욕이 있는 사람들은 계속 열심히 할 수 있는 구조에요. H학점은 받으면 좋고 못 받아도 상관 없는거죠. 그래도 경쟁이나 상대평가가 아예 없는 건 아닌 것이 학교에서 성적장학금을 받는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해요. 사람에 따라 이걸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은연중에 경쟁이 조금은 남아있지 않을까요.

 

  1. 공부하는 분위기는 어떤가요? 주로 혼자 하게 되나요, 아니면 같이 모여서 하나요?
  2. 공부는 혼자 한다기보다는 같이 하는 분위기에요. 특히 모든 동기들이 매 교시마다 한 명씩 배정받고 수업 내용에 대한 필기노트를 작성하고, 이걸 모두에게 공유를 해요. 이 자료는 모든 동기들이 같이 기여한 자료잖아요. 그래서 내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기들과 공부를 같이 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1. 고등학교 때까지는 상대평가가 익숙하셨을 텐데, 대학교에 들어오고 절대평가를 하면서 상대평가였던 고등학교보다 더 좋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나요?
  2. H/P/F로 성적을 내니까 평점을 낼 수가 없잖아요. 내 성적을 수치화할 수 없는 만큼 성적 변화에 따라 느끼는 박탈감이나 속상함도 덜하고, P만 받아도 나쁜 성적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니 압박감도 덜 느끼게 돼요. 또 등수가 중요한 시스템 안에서는 시험 점수를 높이는 공부를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순위를 매기는 구조가 아니라 시험 성적에 얽매이지 않고 정말 학구열을 가지고 공부를 할 수 있어요. 절대평가가 시행되면 학생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데, 의대는 직업과 학업이 연결돼 있는 학과인 만큼 시험문제만 맞히는 것보다 폭넓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또 학업에 몰두하고 싶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동기부여가 되고, 아닌 사람들 입장에서도 다른 분야에 관심을 많이 둘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요. 다른 학교도 이렇게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양한 경험은 OK, 다양한 진로는 글쎄

 

  1. 절대평가를 시행하면서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나요?
  2. 네. 교수님들께서 공부에만 매몰되지 말고 다른 방향으로도 많이 진출해보라고 하시기도 했고, 절대평가가 도입되고 순위에 제약을 받지 않으니 의학 공부 안에서도 시험공부 말고 그 외에 이것저것 관심이 있으면 조금 더 찾아보는 시간이 생기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의학의 범위를 벗어나 다른 분야로 가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경쟁이 줄어들어서 조금 더 관심사를 찾아갈 여유가 생겼어요.

 

  1. 실제로 학교생활을 하면서 다른 분야에 발을 뻗을 기회가 많이 있나요?
  2. 학교에서 커리큘럼 안에 각자 연구 분야를 정하고 연구 계획서를 과제로 제출해야 하는 필수 교육과정을 만들면서 많이 지원해주고 있어요. 저는 사실 그렇게 다른 활동에 많이 참여하지는 않았던 편인데, 주변에 좋은 예는 많이 봤어요. 후배들 중에 창업활동을 시작한 친구도 있고, 인공지능에 관심이 있어서 인공지능 머신러닝 연구에 오랫동안 참여하고 있는 동기도 있어요. 헬스 쪽에 관심이 있어서 특성화 과정으로 체육교육학과에 가서 재활과 관련해서 진출한 사람도 있고요. 그 외에도 전반적으로 연구에 조금씩은 발을 담게 되는 것 같아요.

 

  1. 연세대에서 현재 절대평가를 도입한 이후로 2년째 졸업생이 나왔는데, 졸업생들의 진로도 이전보다 다양해졌나요?
  2. 그랬다면 이상적이었겠지만 의대라는 곳이 진로가 많이 정해져 있는 곳이다 보니 그런 사례는 많이는 못 본 것 같아요. 다른 학교 의대생들처럼 대부분 인턴, 레지던트 단계를 밟아간다고 알고 있어요. 그 이후에 어떻게 진로가 나뉘었는지는 아직 졸업생이 배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고 학교 생활하는 학생들이 있는 만큼 앞으로 점점 좋은 사례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김태희 기자 / 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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