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과생을 위한 ‘의사의 언어’ 바로 알기
- 의학 용어의 분류체계와 표준화의 중요성
학문의 시작은 그 학문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학계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면 원활한 지식의 습득과 적용이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학문은 용어체계를 가진다. 특히 의학에서는 대부분의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전문용어가 아닌 일상적인 언어를 이용해 표현하고, 다른 의료진 및 의료기관끼리는 전문용어를 통한 일관된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므로 용어의 표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 빅데이터를 사용하는 광범위한 보건의료 연구를 위해서는 의학용어를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 일관되게 저장해야 한다. 용어의 ‘코드화’를 가능케 하는 적절한 분류체계가 필요한 이유다.
의학의 용어체계 알아보기
의학용어체계는 의료 용어를 일정한 목적과 규칙에 따라 정리한 것이다. 분류의 한 기준을 ‘축(axis)’이라고 하는데, 예컨대 기관시스템을 기준으로 하면 혈액, 소화기, 신경 등이 각각 한 축이 된다. 의학에는 각 질병, 치료법, 검사, 약재 등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분류체계가 존재하며 이들은 각기 다른 축을 가진다. 본 기사에는 널리 쓰이는 체계 중 몇 가지만 실어 보았다.
ICD: 1983년 WHO에서 진단용어의 코드화를 목적으로 도입한 질병분류체계로, 징후보다는 병인에 근거해 환자를 분류한다. 3자리 기본 코드에 4자리 상세코드를 더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총 열 번 개정되었으며 가장 최신판인 ICD-11은 2018년에 공포되었다. ICD를 골격으로 한 우리나라의 진단용어 체계가 KCD(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이다.
SNOMED CT: 1965년 미국병리학회에서 출간한 병리학 명명 체계인 SNOP가 발전한 형태이다. SNOP가 국소학, 형태학, 병인, 기능의 4가지 축을 마련했다면, SNOMED는 11개 축으로 되어 있어 훨씬 다양하고 자유로운 코드 조합이 가능하다. 코딩체계, 통제어휘집, 분류체계, 참조용어체계, 어휘록을 모두 포함하는 가장 포괄적인 체계로 평가된다. 다른 국제 분류체계와의 상호매핑이 가능하다.
UMLS: 1986년 미국 국립의학도서관에서 보건의료 분야의 다양한 용어와 코딩체계를 통합하기 위해 개발한 체계이다. 서로 다른 원천의 정보를 개념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을 목표로 두고 문헌자료, 임상 기록, 데이터은행, 인명부 등을 통합한다. 특히 전자의무기록의 ICD 코드와 논문검색시스템의 MeSH(의학문헌색인)를 연결해 의사가 진료와 동시에 질환에 관련된 논문을 검색할 수 있도록 했다.
LONIC: 헤모글로빈 수치나 활력징후, 심전도처럼 검사와 임상 관찰 결과를 명명하는 시스템이다. ‘분석물의 명칭, 관찰 속성, 측정 시기, 표본 종류, 측정 등급, 측정 방법’의 6개 축을 가진다.
ATC: WHO가 표준으로 채택한 약제의 계층적 분류체계이다. ‘약이 적용되는 부위, 약효, 약물학적 특성, 화학적 특성, 성분명’의 5단계 분류법을 따르며, 제조 물질, 투여 방법, 용량 등도 포함한다.
의료정보학의 근간으로서의 의학용어 표준화
디지털 정보기록은 환자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도록 돕고 의료의 질을 높이며, 대규모 의학 연구를 용이하게 해 준다. 그렇다면 의료 데이터는 어떻게 컴퓨터에 저장되어 활용될까?
첫 단계는 OCS다. OCS는 ‘처방전’과 같은데, 의사의 처방을 컴퓨터를 통해 신속하게 진료 지원 부서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다. 수납 및 투약 대기 시간을 단축하는 등 진료 과정을 단순화할 수 있다. OCS의 상위 형태가 바로 EMR이다. 전자의무기록이라고도 하는 EMR은 ‘차트’와 같은 존재다. 환자의 정보를 전산화해 입력, 관리, 저장해 진료자가 언제든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준다. EMR에 의료영상을 저장하고 전송하는 PACS를 연동해 운영하기도 한다. PACS는 CT나 MRI, 투시촬영장치, 혈관조영장치, 유방암검진기 등 다양한 의료영상장비의 이미지를 비롯해 초음파, 내시경, 현미경 등의 이미지도 연동 가능한 시스템이다.
한편 EMR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EHR도 있다. EHR은 전자건강기록으로, 질병뿐 아니라 활력징후, 과거 병력, 알레르기, 예방 접종 날짜 등 개인의 포괄적인 건강정보를 저장한다. EMR의 사용자가 의사로 제한되어 있다면, EHR은 외부로 자유롭게 공유될 수 있다. 따라서 환자는 EMR에는 접근할 수 없지만 EHR은 볼 수 있다.
이렇듯 의료 정보는 다양한 서버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언어가 달라 서로 호환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데이터의 단계적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원활한 연동을 위해 검토와 표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에 한국보건의료용어표준(KOSTOM)이 제정되었는데, EMR 구축이 확대됨에도 표준화의 부재로 의료기관 간 용어 호환이 어렵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전국의 주요 대학병원에서도 다양한 용어체계의 매핑을 통해 표준용어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행해진 바 있다.
그리고 2021년 4월, 보건복지부에서 연구용 데이터의 전처리 부담 감소 및 데이터 연계·결합의 활성화를 목표로 ‘보건의료데이터 표준화 5개년 로드맵’을 발표하였다. 로드맵에는 KOSTOM과 국제용어표준을 연계한 체계 마련과, 데이터 교류의 활성화를 위한 FHIR(차세대 전송기술의 국제표준)의 도입이 포함된다. 이렇게 마련된 표준은 EMR과 연동하여 연구중심병원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확산될 예정이다. 나아가 헬스케어 기기가 보편화됨에 따라, 개인의 건강데이터와 임상데이터를 연계해 임상 정보와 마이헬스웨이(정부에서 추진 중인 개인 건강정보 플랫폼), 건강관리 서비스 간 연계를 위한 표준화 가이드라인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보건의료 분야 R&D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원격의료와 의료인공지능이 지속적으로 화두에 오르고 있다. 의학용어 체계의 표준화는 기초 연구를 위한 양질의 빅데이터 구축은 물론, 병원과 환자를 아우르는 디지털 헬스케어를 원활하게 도입하고 상용화하기 위한 필수적인 근간이다. 뿌리부터 튼튼하게 확립되었을 때 가지가 멀리 뻗어 나가듯이, 의학용어 표준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미래 디지털 의료의 울창한 숲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보건의료데이터 표준화 로드맵(’21~‘25)>
김수민 기자/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