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응급실에서 24시간 당직을 선다면?
‘Friday Night at the ER‘로 응급실을 경험해보니 부서 간 협력과 시스템적 사고가 중요해…
금요일 밤, 응급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직접 당직을 서보지 않더라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Friday Night at the ER(이하 FNER)’이라는 테이블탑 게임이다. FNER은 위기 상황에서의 소통과 협력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고안된 교육용 게임으로 스탠포드대학, CISCO, INTEL, PEPSI 등 전 세계 30개국의 1000개 이상의 조직에서 경험학습 프로그램으로 도입되기도 했다.
의사에게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가? 풍부한 의학적 지식에 더하여 중요한 것이 바로 소통과 협력, 그리고 시스템적 사고다. 의사들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다학제적 토론, 협진을 넘어서 간호사, 응급구조사, 물리치료사 등 수많은 의료계 종사자들과도 소통을 해야 한다. 소통을 하는 이유는 환자를 올바르게 진단하고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환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치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지속적인 병원 혁신, 보건의료시스템의 혁신을 이끄는 일원으로서 의료의 질은 높이고 비용은 줄이는 대안을 찾을 수 있는 시스템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럼 우리 의대생들은 어떻게 ‘소통과 협력, 시스템적 사고’를 배울 수 있을까? 본 기자가 재학 중인 학교의 의학교육학과에서는 이를 위해 ‘FNER’이라는 테이블탑 게임을 교내에 도입하였다. 이 게임을 도입한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게임 방법과 효과, 그리고 의의를 독자분들께 소개하고자 한다.
게임의 방법과 규칙
한 팀당 네다섯 명의 참여자들은 고유의 병원 이름을 정하고, 금요일 정오부터 토요일 정오까지 24시간 병원을 운영한다. 응급실에서 한 시간 단위로 발생하는 사건을 시뮬레이션으로 진행한다. 참여자들은 4개의 부서를 24시간 동안 운영하며, 매시간 환자의 흐름에 따라 모든 참여자들은 규칙을 준수하며 의사결정을 하여 환자, 의료진, 경영자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내야 한다. 이 게임 이름이 ‘Friday Night at the ER’인 이유는 금요일 밤 응급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임 속 부서는 응급실(Emergency), 수술실(Surgery), 중환자실(Critical care), 입원실(Step-down)로 구성된다. 게임 속에서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각 부서별로 들어오는 환자 수, 퇴원하는 환자 수가 정해진다. 게임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도 여러 가지이다. 예를 들어, 병상과 의료진이 부족해질 수 있다. 환자를 다른 부서 혹은 병원으로 이동시키거나 대기실에 배치할 수 있고, 추가 의료진을 고용할 수 있다. 다만 모든 조치에는 비용이 발생하고 의료의 질에도 영향을 준다.
게임의 대원칙은 환자에게 의료진 한 명을 꼭 배치해야 한다는 점이다. 의료진이 부족하고 추가 의료진을 고용하지 않는다면 빈 병상에 환자만 두어서는 안 된다. 환자를 이동시키거나 추가 의료진을 무조건 고용해야 한다. 게임의 대원칙만 지킨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병원을 운영할 수 있다.
게임이 낯설기도 하고, 참여자들의 업무 배치가 바뀌기 때문에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게임 초반에 어려움을 겪곤 한다. 따라서 게임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서는 각 팀을 도와줄 퍼실리테이터들이 사전 교육을 받는 것이 좋다. 실제로 이 게임을 만든 회사는, 게임에 대한 교육 이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FNER 보드판에는 총 네 개의 부서가 있다; 응급실(Emergency); 수술실(Surgery); 중환자실(Critical care); 입원실(Step down)
위기 상황에서의 대응 방법
매시간 참여자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며,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참여자들은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최선의 선택을 내리고, 모든 결과를 준비된 차트에 기록한다. 그 과정에서 참여자들 간에는 서로 가치관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가치관은 갖더라도 방법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어떻게 위기 상황들을 모면하는지가 이 게임의 핵심이다.
게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각 팀은 병원 운영 원칙을 의논해본다. 환자, 의료진, 병원 경영 모두에 있어 만족을 주긴 어렵기에 대략적인 원칙을 정하는 것이 병원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본 기자와 함께했던 팀은, 환자 만족을 최우선으로 하여 병원을 운영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게임을 진행하니, 병상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환자를 다른 부서나 대기실로 이동시켜야 하는 경우가 생겼다.
본 기자가 속했던 팀은, 환자 만족과 비용 절감을 생각하며, 의사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응급실 대기실 인원이 6명을 넘어가면, 구급차로 이송된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이송시켰다. 서너 시간 응급실에서 대기하는 비용이 다른 병원으로 이송시키는 비용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는 비용을 위한 선택이었다. 한편, 입원실에 자리가 없는데 환자가 더 들어오는 경우도 생겼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대기실을 이용해야 했다. 중환자를 응급실 대기실로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환자를 위한 선택이었다.
게임을 하며 모두가 동일하게 느꼈던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병원이 수용하기 힘들 만큼 환자가 내원하였고 병상은 빌 틈이 보이지 않았다. 팀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상의해야 했다.
게임을 마치고 나면, 팀별로 병원의 비용과 의료의 질이라는 두 가지 점수를 낸다. 최상의 결과는 비용은 줄이고, 의료의 질은 높이는 것이다. 결과는 각 병원의 운영방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또, 같은 운영방침이더라도 팀원들이 어떤 해결책들을 모색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게임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수치상 결과 외에도, 게임 참여자들의 분위기, 문화, 만족도도 게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개인의 위기 대처 능력과 더불어 팀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참여자 A와 참여자 B가 각기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무슨 아이디어를 실행할지 합의가 되지 않으면 그 아이디어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좋은 결과를 얻어내는 팀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이상미 교수님의 경험에 의하면, 평소 의학지식뿐만 아니라, 리더십, 소통, 논리력 및 분석력, 다양한 분야의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게임을 잘 주도한다고 하셨다. 예를 들어, 매우 낮은 비용과 높은 품질을 유지한 한 팀의 전략을 살펴본 결과, 그 팀은 평소 경영학에 관심이 많던 한 학생이 데이터 기반 경영 원칙을 내세웠고, 팀원들을 설득함과 더불어 함께 소통하면서 시스템적으로 병원을 운영했다. 또 다른 예시로, 매우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리고, 다른 팀들과는 다른 모습의 보드판을 운영했던 팀도 있었다. 교수님은 그 팀이 매우 낮은 성과를 보이리라 생각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반대였다. 이상미 교수님은 게임의 결과는 모든 팀마다 다르고, 모든 상황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게임의 결과를 초래하는 다양한 영향 요인을 분석하는 것은 의미 있는 연구가 될 거라고 하셨다.
박경혜 교수님은 이 게임의 참여자들이 공통적으로 어려워하는 부분은 응급실 환자 수가 증가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규칙을 지키는 것을 넘어 창의적으로 사고하길 어려워하고, 경영이 병원의 수익과 관계있다는 점을 연결 짓지 못하는 것 같다고도 덧붙이셨다.
누구를 위한 게임인가
이 게임은 비단 의대생뿐만 아니라 현직 의료인들에게도 효과적이다. 오히려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병원에는 얽혀있는 이해관계가 참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을 하다 보면 자신이 속한 부서의 일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하지만, 자기만 생각하면 갈등이 생길 때 서로 만족할만한 합의점을 찾기 어렵다. 이때는 조직의 사명과 비전, 핵심 가치를 생각하며, 제 3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게임은 현직 의료인들의 시야를 확장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가 공통된 목표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조직의 단합력도 높여준다.
의료인, 비의료인, 학생들과 게임을 모두 해본 이상미 교수님은, 각 집단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셨다. 현장에서 일을 하는 의료진들은 이미 익숙해진 사고와 행동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비의료인은 좀 더 유연한 생각으로 게임에 참여하였다. 학생들은 매뉴얼과 규칙에 따라 신중하게 의사결정을 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이는 교육 현장에서 원칙을 배우지만, 조직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 관행, 이전 경험 등이 가치관, 태도,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이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하셨다. 아직 연구나 통계로 그 차이가 입증되진 못했지만,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해 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게임이 의료체계 개선에도 도움이 될까? 응급의학과 전문의면서 의학교육학과 교수이신 박경혜 교수님께 직접 여쭤보았다. 게임에서처럼 모든 것을 혁신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응급실 과밀화나 응급실에서 환자를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하셨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제도와 규칙이 있고, 부서 및 직종이 지켜야 하는 역할이 있기에 매우 안타깝다고 하셨다.
연구를 통해 좋은 결과를 이끄는 요인이 밝혀진다면, 현장에 계신 분들의 실질적 경험과 비의료인 및 학생들의 창의적인 생각이 타협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FNER은 의료계 외의 모든 조직에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의료지식이 필요하지 않은 보드게임 형식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조직의 미션과 비전, 핵심 가치를 어떻게 구현해 나갈 것인지를 생각해보고, 실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이상미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기타 인터뷰
다음은 위 기사에 미처 담지 못한 인터뷰 내용이다.
(박경혜 교수님: 이하 박 교수님, 이상미 교수님: 이하 이 교수님)
Q: 어떻게 이 게임을 알게 되셨나요?
박 교수님: 전문직 간 교육 방법을 배우는 워크숍에서 알게 되었어요. 워크숍을 진행하신 타 대학 간호학과 교수님께서는 미국 한 대학의 시뮬레이션센터 연수 중에서 FNER을 접하셨다고 하고요. 리얼하게 반영한 응급실 상황과,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각 부서별 협동과 혁신적인 생각이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너무 강렬했어요.
Q: 이 게임이 교내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나요? 또 앞으로의 활용 방안은 어떠한가요?
이 교수님: 현재 박경혜 교수님과 병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고 있고, ‘의대생으로서의 리더십’ 과목에서 본과 1, 2학년 대상으로 게임을 진행하고 있어요. 마지막 수업 때 이 게임을 진행함으로써 학생들이 의료진과 실무자가 되어 리더십 이론을 게임에 적용하고 성찰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의학과 전 학년을 대상으로 선택과목으로 진행해보아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병원의 모든 직종에서 공통역량 교육으로 시행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의대생들이 좋은 임상의사를 넘어 전문직업성을 갖추고, 보건의료시스템의 변화를 이끄는 에이전트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저의 교육 사명입니다.
박 교수님: 제 개인적으로는 병원과 대학 직원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만, 아직 연구자를 충분히 수집하지 못했습니다.
본 기자는 ‘Friday Night at the ER’이라는 게임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앞으로 맞닥뜨릴 상황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의료인의 의사결정에는 환자뿐만 아니라 병원의 운영, 각 부서의 역할 및 이해관계 등이 영향을 미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과는 없더라도, 과정에서 서로 존중하며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모두가 협력해야 한다. 의료인들의 협력은 거시적으로는 병원의 경영, 미시적으로는 환자들과의 라포, 동료들과의 동료 의식을 발전시킨다.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며 기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교육은 의사로서의 가치기반 교육, 프로페셔널리즘, 경영자와 리더로서의 역량을 쌓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경혜 교수님과 이상미 교수님은 의학교육학과 소속 교수님으로, 의사가 될 의대생들의 비임상적 역량과 전문직업성을 교육하는 데 앞장서고 계시다. 특히 박경혜 교수님은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느끼셨고 의학교육학과 전임 교수가 되시면서, 미래 의사 양성을 위해 임상 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교육하고 연구하고 계신다. 이상미 교수님은 의학교육 박사로 의대생들이 주도적으로 학교생활을 하고 진로를 그릴 수 있도록 선택 수업들과 연구를 진행하고 계신다.
김현 기자/연세원주
<lisa0512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