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과 메타버스
– “현실과의 연속성이 보장된 가상세계”가 제시하는 새로운 가능성
메타버스(Metaverse)는 이제 단순 화두가 아니다.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생활에 자리잡고 있는 메타버스는 의료계에서도 교육 및 실습, 진료 시뮬레이션, 스마트수술 등에 도입되고 있다. 특히 가상세계라는 자각을 주면서도 현실과의 연결을 보장하는 메타버스의 특성은, 의학기술의 발달과 합쳐져 우울증, 치매, 불안증 등 정신과 질환으로의 확장을 가능케 한다. 본 기사에서는 메타버스가 어떻게 정신질환의 예방, 진단, 회복에 활용되고 있는지 알아본다.
메타버스는 현실과 가상이 합쳐진 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와 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현실의 나를 대리하는 아바타를 통해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때의 활동들은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현실의 연장선상에 있다. 즉 메타버스란 현실이 가상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메타버스 속 아바타는 나의 다양한 성격을 가상세계로 투영할 뿐만 아니라 현실의 나로부터 책임과 권리를 위임받아 행동하는 대리인이다.
정신질환 극복을 돕기 위한 메타버스는 주로 디지털 플랫폼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올해 7월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에서 우울증과 불안 증상 감소를 돕는 AI기반 원격 헬스 플랫폼 ‘유퍼(Youper)’를 개발했다. 유퍼는 환자의 기분상태를 확인하는 자가진단표와 이를 기반으로 기분전환 방법이나 행동을 추천해주는 챗봇, 전문의 상담 및 진단을 받을 수 있는 화상전화, 처방된 약의 배송 서비스 등을 포함한다. 플랫폼 사용자 4500명을 대상으로 4주간 효과를 관찰한 결과, 사용 2주 뒤부터 불안증상은 24%, 우울증은 19% 감소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한양디지털헬스케어센터를 중심으로 디지털 우울증 치료 플랫폼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국내 우울증 환자가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겼으나, 감염 우려 때문에 병원에 방문하기 쉽지 않다는 점에 대한 대안이다. 이 플랫폼은 게임을 이용한 우울증의 예방 및 치료를 목표로 한다. 우울증 진단 데이터를 표준화한 후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맞춤형 디지털 치료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다. 게임을 통해 치료에 도움이 될 자세나 운동을 추천하며, 처방 일수와 종류는 의사 진단에 따라 개개인에게 최적화되어 제공된다. 향후 우울증뿐 아닌 자폐, ADHD, 치매 등 다양한 정신질환에 적용할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가상의 공간을 마련한다는 메타버스의 특성은 정신과 상담에도 활용될 수 있다. 메타버스를 통해 가상의 진료실을 구현해 의사나 환자가 가상공간에서 만나 대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정신과 상담의 접근성을 낮춤으로써,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장애인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병원을 방문하기 꺼려지거나, 방문 및 상담에 드는 비용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가상공간에서의 대화가 실제 대면 정신과 상담에 대한 불안감을 완화시킬 수도 있다. 수술을 앞둔 환자들이 불안감을 덜 수 있도록 메타버스로 구현된 수술실을 둘러보게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아가 가상현실의 흥미성이 치료 프로그램에의 몰입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 메타버스 속 환자들은 이곳이 가상현실이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에, 실제 상황이었다면 마주하거나 시도하지 못했을 대처방식을 실행해 볼 수 있다. 이는 우울증이나 공포증, 불안증 등의 유형별로 특정 상황에 노출시켜 스트레스 요인을 인식하게 한 후 적절하게 대처해나갈 수 있도록 한다.[1]
또한 메타버스는 아바타를 내세워 사람 대 사람 간의 상호작용을 가능케 한다. 이는 노인들이 메타버스를 통해 구현된 가상의 병원 환경에서 대화와 놀이를 하며 우울증을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한다. 가상공간에서의 활동은 실시간 모니터링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서 중독이나 치매 등이 의심되면 실제 병원에 보내 치료를 받도록 할 수 있다. 실제로 메타버스 내에서 뇌파와 동공의 크기 변화, 시선처리 속도 등의 데이터를 확보해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사람을 알아내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인지저하증을 다루는 메타버스의 대표주자는 엠쓰리솔루션의 ‘베러코그VR’이다. 이는 현재 전국 80여기 치매안심센터와 병의원, 주간보호센터를 통해 제공되고 있는 디지털 인지재활 콘텐츠 ‘베러코그’의 가상현실 버전으로, 다양한 컨텐츠와 그룹 교육 기능을 통해 치매 예방과 조기진단을 가능케 한다.
메타버스는 가상공간이지만 일상의 연속성을 보장한다. 메타버스에서 사람을 만나고 회의하고 여가를 즐기는 등의 일이 단발성 체험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여정처럼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가상 의료공간에서의 행위와 상호작용, 치료 효과가 현실로 이어져 현실세계의 환자에게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만큼 ‘현실’ 역시 매우 중요하다. 가상공간에서의 만남은 사람 대 사람으로 직접 대면해 이야기를 나눌 때의 친밀감과 익숙한 공기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메타버스의 장점은 장점대로 현명하게 활용한다면, 정신질환을 조기에 예방하고 정신과 상담의 접근장벽을 낮추며 환자의 불안과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의대생으로서 충분히 관심을 갖고 고민해볼 변화가 아닐까.
김수민 기자/경희
<lucid020219@khu.ac.kr>
[1] 참고문헌: 김민지·최선우·문선영·박해인·황희경·김민경·석정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의학행동과학연구소), 가상현실기법을 활용한 정신건강교육 및 기술훈련 프로그램의 우울증상 회복 및 자살위험성 감소 효과, JKNA,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