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닥터의 병원이야기: 그림 그리는 김정욱 신경외과 전공의 인터뷰

드로잉닥터의 병원이야기
: 그림 그리는 김정욱 신경외과 전공의 인터뷰

“제가 잡았어요. 비장동맥 출혈부위, 제가 지금 손으로 막고 있습니다. 환자베드 빨리 수술실로 옮겨주세요!”
철근이 복부를 관통한 환자를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점을 느낀 여주인공은 남들이 모두 말리는 시점에서 굴하지 않고 개복을 했다. 분명 아무도 잡아내지 못한 복강 내 출혈이 있을 거라고 다급하게 소리치고 환자가 누워있던 베드 위에 올라탔다. 배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서 헤집더니, 이내 특정 동맥의 터진 부위를 손가락으로 잡고 있다고 수술실로 옮겨 달란다.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지만 주인공과 비교해서 자동적으로 자기반성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해부실습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입장에선 복강을 다 열어젖히고 두 눈으로 유심히 보아도 이것이 비장동맥인지, 정맥인지, 혹은 그 근처를 지나가는 이름 모를 신경분지인지 확신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의사라면 그래야 하나? 내가 이런 상태인건 아직 ‘정식’ 의사가 아니기 때문인가? 아니면 헛공부를 했나? 너털웃음이 나는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바로 우리나라 의학드라마의 허구성에 대해 짚는 기사가 올라왔다. 의사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 포장하는 부분과, 메디컬드라마가 곧잘 다루곤 하는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응급상황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드라마를 통해 좀 더 현실적인 의료상황을 간접체험하고 싶었던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생동감을 느끼기 위해서 꼭 시각매체를 고집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골든타임이 죄어오는 그 아찔한 순간을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 의사들이 직접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블로그와 소셜네트워크는 새로운 공감창구의 역할을 했다. 특유의 아름다운 스케치와 함께, 수술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김정욱 삼성창원병원 신경외과 전공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지난 9월부터 페이스북에서 ‘드로잉 닥터의 병원이야기’를 연재 중인 그를 만나 보았다.

Q. 수술실의 이야기들을 연재하게 된 계기를 부탁드립니다. 페이스북이었던 이유가 있을까요?
A. 책과 씨름하던 의대생시절과 달리, 현장에서 진짜 ‘의사’로서 일하다보면 당연하지 않은 일들을 당연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환자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어떤 연유로 병원에 오게 됐는지는 생략하고, 상처나 질환만을 보게 되는 거죠. 그런 모습으로 굳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응급실에서 당직을 서면서 생긴 일, 수술실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꾸준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연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생각했고요. 원래는 블로그에 연재했었는데 아는 형이 페이스북에도 해보라고 권유해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Q. 전공의인데다가, 그것도 수술이 주가 되는 신경외과보드라면 굉장히 바쁘고 피곤할 것 같은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한가요?
A. 평소에 어떤 소재가 떠오르면 틈틈이 아이디어 노트에 적당히 써두거나 그려두고, 주로 주말에 그립니다. 한 자리에 앉아서 집중하면 그림과 글까지 합쳐 한두 시간 정도 걸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제나 완성도가 낮은 것이 아닐까 싶지만, 그래도 일부러 완성도에 고민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꾸준함을 놓칠 것 같아서요.

Q.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남기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을까요?
A. 글쎄요. 아마 드로잉 북 한권을 그림으로 모두 채웠을 때인 것 같네요. 무언가를 끝까지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의 만족감에서 오는 기쁨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Q. 연재하신 이야기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하나 소개 부탁드립니다.
A. 환자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데, 가급적 이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는 풀고 싶지가 않아요.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거니와 누군가의 아픔이 ‘이야기’가 되는 건 제 글 위 에서만으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런 에피소드들을 제외하면 저는 ‘언젠가 바람은 분다’ 라는 에피스드가 제일 맘에 들어요. 활발하게 부대끼던 시절을 지나 아무 바람도 오지 않는 시기가 왔을 때 참 많이 방황했었고, 그 시기를 이겨낸 것도 ‘항상 어딘가에는 무풍지대가 존재한다.’는 글을 책에서 보았을 때거든요. 누구나 달려야 하고, 내 옆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달리는 시기지만 좀 누워있어도 괜찮습니다. 본인이 누워있는 걸 모조리 기억만 하고 계세요. 그러다 일어나고 싶을 때가 되면… 바람이 불면 그때 일어나 달리면 됩니다. 이 이야기를 항상 하고 싶었어요. 그림도 글도 부족해서 언제나 미루고만 있었던 이야기였는데 어찌어찌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억에 남아요.

Q. 연재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점…일까요?(웃음) 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게 되기도 하구요,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나 인턴, 같은 동료 의사들, 병원의 다른 직군에 속한 사람들을 만날 때도 좀 더 관심 있게 보게 된 것 같아요. 제 글이 그런 내용이니까, 소재의 탐색이란 것보다도 제가 쓴 글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어집니다.

Q. 학창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리셨나요?
A. 그 때부터 그림을 그리긴 했는데 잘 그렸었는지는 모르겠고요 그리고 아직도 잘 그리는 줄은… 모르겠습니다.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진심입니다. (웃음) 그래서 작은 노트에 여러번 끄적이고, 연습하고 있어요.

Q. 그림을 그릴 때는 주로 어떤 도구를 쓰시나요?
A. 마이크론 피그먼트펜을 크기별로 쓰구요(0.05~1cm) 채색을 할 때는 색연필과 물감을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 너무 집중하지 말고 기록 자체에 집중하자는 마음으로 드로잉북 대신 얇은 일반 노트(몰스킨 그리드노트)에 그리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수채물감이 닿을 때마다 너무 종이가 울어요.

Q. 주로 스케치와 채색 위주의 드로잉을 하시는데 혹시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려보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A. 그럼요. 유화로 물감 듬뿍 묻혀서 석석 그려 보는 것이 꿈입니다. 그래서 전공의가 끝나고 시간이 나면 그림부터 좀 배워보고 싶어요.

Q. 연재 회차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책으로 발간하셔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향후 계획이 있으신가요?
A.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Q. 신경외과는 환자의 예후가 매우 드라마틱한 과 중 하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맡으셨던 수술 환자분들 중에서 가장 힘드셨던 케이스나 가장 보람찼던 케이스가 있을까요?
A. 가장 힘든 건 합병증(compli-cation)이 생긴 환자를 마주하는 매일 아침이에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일이 어렵고 긴장 됩니다. 까다롭지만 해볼 수 있는 병변 혹은 환자와, 이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병변 혹은 환자를 마주하는 것은 참 다릅니다. 죽음과 완치가 함께 있는 과입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사망을 피할 수 없었던 SDH환자, 살려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metabolic acidosis가 심해 결국 돌아오지 못한 아기, mental에 심각한 장애를 받았지만 그래도 서서히 회복해서 외래 수술방 문을 걸어 들어오게 된 SAH환자, 디스크 수술 이후 발목 힘이 돌아와 웃으며 퇴원한 할머니, 3번의 반복된 디스크 수술 이후에도 통증은 점차 심해지지만 이제 믿을 데라곤 우리 병원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아저씨 등…이 중에서 최고난이도(?)와 최고의 기쁨을 가려내기란 지금와서 떠 올려봐도 참 어렵네요.

Q. 전공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셨던 순간이 있나요? 혹은 정말 잘 선택했다, 하셨던 순간이 있나요?
A. 살아있는 뇌를 처음 보았을 때, 중환자실에서 환자가 좋아져 일반실로 올라갈 때 보호자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함께 참여한 수술을 마치고 나와 찍은 환자의 CT가 맘에 들 때 그리고 어머니께서 친구 분과 전화하시는 도중에 ‘그래. 우리아들 사람 살린다 아이가’ 하시는 걸 엿들었을 때. 신경외과를 잘 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신경외과를 선택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A. vital을 다루는 것이 두렵다고 하는 친구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그 이유로 신경외과 지원을 포기하는 친구들도 있었구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vital을 만나는 것과 다루는 것을 구분을 해야 한다고. 의사가 된 이상 vital은 언제 어디서 무슨 과를 불문하고 ‘만나게’되어 있습니다. 숨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습니다. 영상의학과도 시술 중에 arrest가 날 수 있고 심지어 피부과도 anaphylaxis를 만날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숨지 않고 vital을 다루고 싶다면 신경외과가 어울릴 것 같네요.

Q.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둘 중에 어떤 선택이 옳다고 보시나요?
A.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앞뒤 맥락 없이 그냥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살아보니 잘하는 걸 택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좋아하는 걸 쫓으면서 살고 싶습니다.”

Q. 의사가 아니었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하셨을까요?
A. 모르겠습니다. 의사가 되길 잘 한 것 같습니다.

Q.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향후 계획은 어떤 것이 있나요?
A.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국방의 의무를 다 하러 갑니다. 물론 군의관이 되어서도 계속 그림은 그릴 계획입니다.

Q. 전공 선택을 앞두고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A. 이런 질문 참 어렵습니다. 제가 잘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한테 조언을 할 깜냥이 되는 것도 아닌데, 싶어서요.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대부분의 의대생이 학창시절의 제모습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일 겁니다. 조언이란 말은 조금 그렇고, 그래도 먼저 지나온 사람으로서 과거의 제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네요. 어떤 고민이든 지금 당장에 닥친 걱정의 크기는 어마어마할 겁니다. 뒤가 보이지 않으니 더 그렇지요. 그런데 그 고민을 짊어질 날들을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무슨 소리냐면, 인생이 80세까지라고 가정했을 때 과를 결정하는 순간이 대략 25~30세 사이일거고, 그럼 남은 날들이 최소 50년 이상입니다. 날짜로 하면 18250일입니다. 지금의 고민이 불러올 짐이 있다면 그 짐을 18250등분 하면 하루분의 무게가 나옵니다. 제아무리 무거워봤자 18250등분입니다. 그 사이에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짐은 더더욱 가벼워집니다. 고민은 아름답지만 스스로를 너무 아프게 몰아세울 필요 없습니다. 힘내세요.

신윤경 기자/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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