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진료’ 없어질까… 이제는 ‘15분 진료’
고질적인 ‘3분 진료’ 깨기 위해 ‘15분 진료’ 시범사업 시행 예정
“정신과 의사가 환자 얼굴도 보지 않고 약만 처방했다”, “3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의사에게 진료는 3분도 채 받지 못했다”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정평이 나있는 우리나라 의료. 그럼에도 환자들은 병원에 갔다 온 다음이면 항상 불만족을 표하는데, 이는 바로 우리나라 의료의 고질적인 문제인 ‘3분 진료’ 때문이다.
지난해 8월 일산병원에서 조사한 국내 종합병원 초진환자 평균 진료시간은 6.2분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서울의 대형 대학병원 교수들은 실제로 1-2분에 진료를 끝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서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제대로 된 진찰을 할 수 없고, 의사는 모니터만 보고 질문을 쏟아내는 진료밖에 할 수 없다. 환자는 궁금한 것을 물어볼 시간도 가지지 못한다. 부족한 진료는 각종 검사를 통해 해결해 오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환자는 서운하고 의사는 억울한 이 3분 진료의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어느 의사도 3분 진료를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환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은 채 대충 3분 만에 넘겨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진료하는 의사는 없다는 이야기다. 대개 어느 문제든 원인을 파고 들어가면 근원에는 제도가 있다. 의사들이 현재의 ‘박리다매’식 진료를 할 수 밖에 없도록 내몰린 데에는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으로부터 큰 부분이 기인한다. 그 시스템의 핵심적인 요인으로 진료에 대한 수가 체계를 꼽을 수 있다.
박리다매 3분 진료. 비정상적 수가 체계와 환자쏠림이 원인
우리나라 의료에서 MRI 검사와 같은 유형의 서비스는 비교적 후하게, 그러나 무형의 서비스인 환자와 의사간 1대 1 진료는 낮게 수가가 배정되어 있다. 낮은 수가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가장 큰 문제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제외한 모든 과에서, 환자 진료에 1분을 쓰든 1시간을 쓰든 동일한 진료비가 책정된다는 것이다. 어느 의사가 천 원을 더 받고 10분 동안 더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면 그것은 위법으로 처벌된다. 10분을 진료하면 5만 2170원, 60분을 진료하면 24만 6860원이 책정되는 미국의 진찰료체계와 비교할 때 이 점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택시를 타서 1km를 가든 100km를 가든 요금이 똑같게 나오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요약하면 낮은 수가, 그리고 진료시간과 무관한 수가로 인해 의사들은 3분 진료로 낮은 수가를 벌충하고 있는 것이다.
3분 진료 현상의 다른 중요한 원인은 병원을 찾는 환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역시 앞서 언급한 낮은 수가와 무관하지 않다. 병원을 찾는 ‘문턱’에 해당하는 진찰료가 매우 낮기 때문에 경증 환자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병원을 더 쉽게, 자주 방문한다. 그만큼 의사가 환자 한 명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은 적어진다. 대형병원의 경우 쏠림현상으로 인해 특히나 환자들이 많이 몰리는 경향이 있어 문제가 더 심각하다. 서울의 모 대학병원은 하루 평균 외래환자만 9000명이 넘는다. 오전에만 수 십 명, 많게는 100명 이상의 환자를 보아야 하는 대학병원 교수가 환자 한 명당 3분 이상의 많은 시간을 쓴다면 이후의 환자들은 대기시간이 그만큼 길어질 것이고, 의사 입장에서는 당장 진료실 밖에 줄서서 기다리는 환자들의 원성을 듣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약물 치료만으로 해결이 되는 환자들이라면 병ㆍ의원급 작은 병원들을 찾도록 해야 대학병원 외래가 정상화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많다.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지는 외국의 병원과 대조하며 우리나라는 왜 그렇지 못하냐는 비판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병원의 사정이 외국과 다르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병원에서는 진료비가 너무 낮아 환자를 많이 보지 않으면 병원경영이 불가능하다. 쇼핑을 하는 경우에 비유해보자. 물건을 살 때 백화점에 가면 편안한 분위기에서 종업원에게 여러 질문을 하며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물건에 대한 보증도 받는다. 대신 그만큼 비싼 값을 내야 한다. 하지만 아주 혼잡한 시장 바닥에서 백화점에서와 같은 서비스를 요구한다면 물건을 사기는커녕 그냥 쫓겨날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가 이와 마찬가지다.
정부 ‘15분 진료’ 시범사업 시행. 적용 대상은 일부 환자만
환자들이 3분 진료에 대해 입을 모아 불평을 하는 가운데, 그렇다면 적절한 진료 시간은 몇 분일까. 일산병원 연구팀에 의하면 1인당 평균 진료시간이 최소 8.9분으로 늘어나야 만족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만족할 만큼 진료시간이 늘어난다면 환자들은 약 6천원을 추가로 부담할 의향이 있다고 파악되었다.
최근 정부도 이 불만을 받아들여 시스템을 개선하고자 나섰다. ‘15분 진료(심층 진료)’에 대한 수가를 만들고 시범사업을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지금은 3분을 진료하든 15분을 진료하든 진찰료 수가가 같은데 이것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 ‘15분 진료’다. 지금까지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때 수가는 2만 4천원인데 반해 15분 진료의 수가는 9만원에서 10만원 정도로 기존의 4배 정도로 책정될 계획이다. 그러나 환자가 부담하는 금액은 약 2만 7천원으로, 기존에 비해 약 3천원만 증가해서 환자 부담은 크지 않을 예정이다.
하지만 모든 진료에 15분을 허용하면 여러 부작용이 예상되므로 적용 대상에는 제한이 있다. 15분 진료는 400병상 이상 규모의 대형 종합병원과 국공립병원에서 진료가 의뢰된 환자에 한해 시행되며, 중증ㆍ희귀난치병질환 환자가 주요 대상이다. 또한 모든 진료과목에 적용하기 전에 우선은 내과ㆍ소아청소년과 등에 먼저 적용할 방침이다. 중증의 환자는 15분 심층 진료를 받도록 하고 경증 환자의 경우 동네 의원에서 진료를 받도록 해 궁극적으로 의료전달 체계를 개선하려는 목적에서 위와 같은 방침이 정해졌다.
‘15분 진료’ 시행으로 예상되는 부작용과 기대
15분 진료가 시행되면 의료가 당장이라도 대폭 개선될 것 같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15분 진료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각종 문제점들이 나타날 수 있다. 첫째, 대형병원 환자쏠림현상이 심각한 현 상황에서 15분 진료 시행 병원에 환자가 몰리게 되면 쏠림현상이 가속화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꼭 필요한 환자에게 적절히 15분 진료가 시행되는 것이 중요하다. 15분 진료와 함께 의료전달체계 개선 등 제도 보완이 따르지 않는다면 환자에게 불편만 끼칠 수 있다. 둘째로 3분 진료를 15분 진료로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만한 질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수가만 올리는 꼴이 될 수 있다. 15분 진료의 평가 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성이 있다. 셋째, 환자 1명에게 15분 진료를 하게 되면 환자 수가 줄어들고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검사 등 다른 진료비가 줄어들기 때문에 수익이 줄어 병원 경영이 악화될 우려가 있다.
위에 언급한 사항들 외에도 여러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해 제도 시행이 삐걱댈 수도 있다. 실제로 의료계에서는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예상되는 문제점들을 시범사업을 시행하면서 개선해나갈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15분 진료는 우리나라 의료가 한 단계 진일보하는 계기로 볼 수도 있다. 의료진은 병력, 생활습관, 치료계획에 대해 환자와 더 많은 이야기를 교환할 수 있고 환자 입장에서도 더 많이 질문하고 답변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정부는 진찰 수가 개선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고, 의사는 환자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면 환자와 의사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제도로 안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15분 진료 시범사업을 계기로 우리 의료가 차차 환자 중심의 환경으로 바뀌어 나가길 기대해본다.
김경훈 기자 / 울산
gutdoktor@naver.com